지상에 대한 애착과 그 지상을 탈출하고 싶은 욕망, 이 두 개의 모순된 감정이 알콜, 술을 환영해 맞아들였다. (17)
'별것 아닌 나 자신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 다른 사람들이나 기쁘게 해주려고 해. 자기를 아끼려고 하지 마.' 사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건강이나 세상 평판이나 등등 모두) 무관심하다는 그것이 정신적 불균형의 심한 증세라는 것을 전연 모르고 있었다. (25)
알콜중독자의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들은 연약하지만 성실하다는 점이다. (38)
목에 힘주는 사람들, 자기 양식에 확신을 갖는, 격언을 즐겨 지껄이는 충고자들, 그대들이여, 청컨대 부탁하노니 알콜중독자들 앞에서 거룩한 입들을 다물어달라. 그대들의 정신세계는 우리 세계와는 다르다. 그대들의 손가락은 너무 안으로 굽었고, 그대들의 마음은 너무 약삭빨라서 우리네 마음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줄 수가 없다. (51)
나는 환자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할 생각은 조금도 없이 싹 무시해버린 채 살아 있는 생활인의 목록에서 내 이름을 삭제해버린 사람들에게, 크게 외치고 싶었다. 그대들은 정직한 사람이 아니오라고. 알콜중독이라는 것은 질병이지 결함, 과오가 아니다. 그것은 고통이지 즐거움이 아니다. 그것은 노예상태의 구속이지 히히거릴 장난거리가 아니다. (60)
나는, 내게 알콜중독이라는 병이 생긴 중요한 한 가지 원인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한잔의 샴페인을 거절함으로써 내가 감히 조카를 난처하게 할 수 없었다. […] 그래서 나는 또다시 궁지에 몰렸다. 알콜중독자는 원래 거절함으로써 남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을 본성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64)
나는 계속해서 나 자신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말한 것은 정말 옳아. 나 같은 경우는, 나 같은 인간은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저 사람도 꼭 나와 같았구나. 저 사람들도 나처럼 전락해버렸었구나. 저 사람도 한밤중에 술을 마시려고 기어나가고 술병을 감추었고, 저 사람도 이중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느꼈고. 이 양반아, 뤼시엥, 이제는 네가 혼자가 아니다. (72-73)
"나의 하느님,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시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또한 지혜를 주시어 이 둘을 분별할 수 있게 하소서." (76)
나는 지금 얼마나 많은 (알콜중독자인)사람들이 바보처럼 죽었는지 알고 싶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입이 두려운 나머지, 처신 잘하는 건강제일주의자들의 비판이 두려운 나머지, 궁지에 몰린 알콜중독환자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고 그러다가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92-93)
진실로 인생을 살아본 사람은 중독이 무엇인가를 잘 안다. (129)
알콜중독은 나를 무겁고 슬프고 빛 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청하면서 내부의 빛이 다시 나타났다. 용서를 청하면서, 나는 땅에 엎드려 슬슬 빌붙는 개가 되지 않았다. 나는 타인에 대한 공포에서, 나에 대한 비난의 공포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내 일생 처음으로 타인의 평가가 아닌 나 스스로의 평가에 대해 감식력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묘해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131-132)
용서를 구하는 것은, 권위, 오만, 옹고집, 악의와의 인연을 말살시키는 데 우선적이다. 이런 것들과의 인연이 말살되면 진실과의 인연이 이루어진다. (134)
내 속에 한쪽 눈은 잠자고 있는 무정부주의자가 있다. 나는 재산도, 나의 동기생 주교들도, 군대의 나의 사령관도 무서워해본 일이 결코 없다. (153-154)
알콜중독을 모르시는 건강한 이들이여, 하느님에 대해 무엇을 아십니까? 하느님은 당신네들을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해내시지 않았소. 당신네들은 언제나 스스로 만족하고 있지 않소? 당신들이 하느님께 S.O.S를 치는 수고를, 당신네들의 재산, 당신네들의 버젓한 명성, 당신네들의 끄떡없는 건강, 그리고 당신네들의 배꼽 쥐게 웃기는 경칭들이 대신해주지 않소? (168-169)
정신적 자유를 향한 신앙의 길, 그 길을 개척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렸다. 본디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 알콜중독에서 빠져나오면서 내게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던 것 중 최악의 일은 내가 이런 사람들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 이런 사람들처럼 된다는 것이었다. 나의 유년시절에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일반적인 사회생활'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었다. 푸케 의사 병원에서 퇴원할 때 사람들이 이렇게 부탁한 적이 있다. "이제는 술을 끊었으니까 우리처럼 되어서 우리처럼 사시오."
그러나 나는, 당신네처럼 살 수 없소. 당신네가 좋아서 혹하는 것이 나에게는 딱 질색이오. 당신네가 아 하고 감동하는 것에 나는 감각이 없소. 당신네가 흥분해서 떠드는 일에 나는 냉랭해지오. 당신네는 좋다고 웃어대는 그것을 나는 가끔 이해할 수 없소. 당신네는 겁이 나서 후들후들 떠는데 나는 하품이 나오. (171-172)
중요한 것은 오늘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의 이름은 뤼시엥입니다. 저는 알콜중독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독재자가 "내 이름은 모모입니다. 나는 남을 고문하는 사람이며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거짓말쟁이입니다"라고 고백할 날을 꿈꾸어본다. 남을 멸시하기 일쑤인 인간이 다음과 같이 말할 날도 꿈꾸어본다. "내 이름은 모모입니다. 나는 만물박사로서 약방감초처럼 끼이지 않는 데가 없고 거만하며 돈을 좋아하는 노랭이입니다." 아직도 꿈이 있소? 네, 있지요.
왜냐하면, 행복에 대한 우리들의 갈망은 시들어버렸다고 생각하기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 행복에 대한 갈망은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에. (177)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맹목적이며 편협되고 고집스런 신앙이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서(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정신의 부조리며 모순이다. 타인을 사랑하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착한 사람들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폭력이 그나마 살아 남은 사람들의 목을 졸라 죽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 인간을,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질병이다. 이 질병은 인간을 술로 이끌어간다. 술을 끊은 지 어언 14년, 지금에 와서 나는 알고 있다. 나의 행복은 조화있게 균형잡힌 이 세 가지 사랑에 기인한다는 것을. (152-153)
: 뤼시엥 뒤발, 최영인 역, [달과 놀던 아이](성바오로출판사,1990)
'별것 아닌 나 자신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 다른 사람들이나 기쁘게 해주려고 해. 자기를 아끼려고 하지 마.' 사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건강이나 세상 평판이나 등등 모두) 무관심하다는 그것이 정신적 불균형의 심한 증세라는 것을 전연 모르고 있었다. (25)
알콜중독자의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들은 연약하지만 성실하다는 점이다. (38)
목에 힘주는 사람들, 자기 양식에 확신을 갖는, 격언을 즐겨 지껄이는 충고자들, 그대들이여, 청컨대 부탁하노니 알콜중독자들 앞에서 거룩한 입들을 다물어달라. 그대들의 정신세계는 우리 세계와는 다르다. 그대들의 손가락은 너무 안으로 굽었고, 그대들의 마음은 너무 약삭빨라서 우리네 마음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줄 수가 없다. (51)
나는 환자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할 생각은 조금도 없이 싹 무시해버린 채 살아 있는 생활인의 목록에서 내 이름을 삭제해버린 사람들에게, 크게 외치고 싶었다. 그대들은 정직한 사람이 아니오라고. 알콜중독이라는 것은 질병이지 결함, 과오가 아니다. 그것은 고통이지 즐거움이 아니다. 그것은 노예상태의 구속이지 히히거릴 장난거리가 아니다. (60)
나는, 내게 알콜중독이라는 병이 생긴 중요한 한 가지 원인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한잔의 샴페인을 거절함으로써 내가 감히 조카를 난처하게 할 수 없었다. […] 그래서 나는 또다시 궁지에 몰렸다. 알콜중독자는 원래 거절함으로써 남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을 본성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64)
나는 계속해서 나 자신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말한 것은 정말 옳아. 나 같은 경우는, 나 같은 인간은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저 사람도 꼭 나와 같았구나. 저 사람들도 나처럼 전락해버렸었구나. 저 사람도 한밤중에 술을 마시려고 기어나가고 술병을 감추었고, 저 사람도 이중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느꼈고. 이 양반아, 뤼시엥, 이제는 네가 혼자가 아니다. (72-73)
"나의 하느님,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시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또한 지혜를 주시어 이 둘을 분별할 수 있게 하소서." (76)
나는 지금 얼마나 많은 (알콜중독자인)사람들이 바보처럼 죽었는지 알고 싶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입이 두려운 나머지, 처신 잘하는 건강제일주의자들의 비판이 두려운 나머지, 궁지에 몰린 알콜중독환자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고 그러다가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92-93)
진실로 인생을 살아본 사람은 중독이 무엇인가를 잘 안다. (129)
알콜중독은 나를 무겁고 슬프고 빛 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청하면서 내부의 빛이 다시 나타났다. 용서를 청하면서, 나는 땅에 엎드려 슬슬 빌붙는 개가 되지 않았다. 나는 타인에 대한 공포에서, 나에 대한 비난의 공포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내 일생 처음으로 타인의 평가가 아닌 나 스스로의 평가에 대해 감식력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묘해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131-132)
용서를 구하는 것은, 권위, 오만, 옹고집, 악의와의 인연을 말살시키는 데 우선적이다. 이런 것들과의 인연이 말살되면 진실과의 인연이 이루어진다. (134)
내 속에 한쪽 눈은 잠자고 있는 무정부주의자가 있다. 나는 재산도, 나의 동기생 주교들도, 군대의 나의 사령관도 무서워해본 일이 결코 없다. (153-154)
알콜중독을 모르시는 건강한 이들이여, 하느님에 대해 무엇을 아십니까? 하느님은 당신네들을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해내시지 않았소. 당신네들은 언제나 스스로 만족하고 있지 않소? 당신들이 하느님께 S.O.S를 치는 수고를, 당신네들의 재산, 당신네들의 버젓한 명성, 당신네들의 끄떡없는 건강, 그리고 당신네들의 배꼽 쥐게 웃기는 경칭들이 대신해주지 않소? (168-169)
정신적 자유를 향한 신앙의 길, 그 길을 개척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렸다. 본디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 알콜중독에서 빠져나오면서 내게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던 것 중 최악의 일은 내가 이런 사람들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 이런 사람들처럼 된다는 것이었다. 나의 유년시절에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일반적인 사회생활'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었다. 푸케 의사 병원에서 퇴원할 때 사람들이 이렇게 부탁한 적이 있다. "이제는 술을 끊었으니까 우리처럼 되어서 우리처럼 사시오."
그러나 나는, 당신네처럼 살 수 없소. 당신네가 좋아서 혹하는 것이 나에게는 딱 질색이오. 당신네가 아 하고 감동하는 것에 나는 감각이 없소. 당신네가 흥분해서 떠드는 일에 나는 냉랭해지오. 당신네는 좋다고 웃어대는 그것을 나는 가끔 이해할 수 없소. 당신네는 겁이 나서 후들후들 떠는데 나는 하품이 나오. (171-172)
중요한 것은 오늘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의 이름은 뤼시엥입니다. 저는 알콜중독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독재자가 "내 이름은 모모입니다. 나는 남을 고문하는 사람이며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거짓말쟁이입니다"라고 고백할 날을 꿈꾸어본다. 남을 멸시하기 일쑤인 인간이 다음과 같이 말할 날도 꿈꾸어본다. "내 이름은 모모입니다. 나는 만물박사로서 약방감초처럼 끼이지 않는 데가 없고 거만하며 돈을 좋아하는 노랭이입니다." 아직도 꿈이 있소? 네, 있지요.
왜냐하면, 행복에 대한 우리들의 갈망은 시들어버렸다고 생각하기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 행복에 대한 갈망은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에. (177)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맹목적이며 편협되고 고집스런 신앙이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서(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정신의 부조리며 모순이다. 타인을 사랑하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착한 사람들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폭력이 그나마 살아 남은 사람들의 목을 졸라 죽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 인간을,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질병이다. 이 질병은 인간을 술로 이끌어간다. 술을 끊은 지 어언 14년, 지금에 와서 나는 알고 있다. 나의 행복은 조화있게 균형잡힌 이 세 가지 사랑에 기인한다는 것을. (152-153)
: 뤼시엥 뒤발, 최영인 역, [달과 놀던 아이](성바오로출판사,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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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사랑했고, 한때 알콜중독에 시달렸던, 예수회 신부의 이야기이다.
신부님을 면담했을 때 나는 이 책을 두 번이나 추천받았다.
한 사람이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을 사랑하기까지는 온 세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 또한 내가 끝내 이해받을 수 없을 거라는 오랜 절망에 시달렸다. 내가 이해받지 못했으므로 적어도 나는 누군가를 이해해야만 했고, 따라서 나는 나를 둘러싼 어떤 상반된 테제 사이의 긴장을 습관처럼 삼키고 살았다. 내 곁에는 도무지 이율배반적인 것들의 장력이 서로 이해를 요구하며 나를 잡아당긴다. 그 긴장이 여지껏 나를 숨막히게 했고 또 그 힘이 나를 살아가게 했다.
가령 나는 자신을 쉽게 용서한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어떻게든 내가 "당신네처럼"은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와 세상에 대한 감수성이 출중한 자들일수록, 그네들은 타협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을 마음 속에 품고 산다. 그리고 그 숨길 수 없는 정파성이 그네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살아있는 것이 때로 용서받아야 할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서로를 나누기란 어려운 일이다.
거꾸로 이해하기 어려운 "당신"들은 보통 쉽게 동경의 대상이 된다. 동경의 이면에는, 동경의 대상과는 '철저하게 다른' 내 자신에 대한 외로움이 안개처럼 비껴있다. 동경이란 어떤 특별한 대상 앞에서 '그보다 더 특별한' 자신의 존재를 몰래 감추는 행위이다. 특별하다는 것은 주로 지독히 외로운 일이었기에, 나는 나와 같지 않은 수많은 것들과의 이율배반을 섭취하면서 그 긴장 속에서 나를 용서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나와 다른 것들을 품으로써만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자신의 특별함을 인정하고 세상 가운데 그 특별함을 놓아두는 데엔 온 인생의 노력이 필요하다.
어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에게 내가 어떤 온기로 가닿았는지, 나로 인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들었다. 그는 나보다 더 성스럽게 살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었고, 나는 그것이 매우 낯설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낯섬이 두렵지 않았고, 감사했다. 그 행복은 내가 여지껏 습관처럼 삼켜왔던 긴장과 이율배반과는 전혀 무관한 자리에서 피어난 것이었다.
나는 내가 외롭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은 결국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힘으로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닌 것처럼. 내가 알지도 못했던 온기가 다른 이에게 가닿은 것을 내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뤼시엥 신부가 알콜중독을 빠져나오기 위해 이 한 마디의 말이 필요했던 것처럼.
"나는 술 앞에서 무력합니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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