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70



엉성한 스토리에 구색맞추기식 공연영상이 낀 너절한 영화일까 걱정했는데 절대 너절하지 않다. 후시 녹음이 아니라 동시 녹음된 공연씬이나 먹어주는 보컬과 연주의 차원을 떠나서, 시종 쾌활하게 달리면서도 그 쾌활함의 배후에 뭐가 있는지를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다. 중간에 등장하는 대공분실 취조장면이나 빨갱이 남편 뒀다 고생하고 돌아가신 엄마를 부르짖는 장면으로 이 영화의 미덕이 재단될 일도 아니다. 이 영화는 그런 새된 정치적 레토릭 몇 개로 위안받기엔 말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은 더 크기 때문이다.

80년대의 노래들을 배우고 가르쳤던 대학 초년병 때를 지나고 나니 모든 무게잡는 정치 감수성이 죄다 구려뵜고, 그래서 나다녔던 게 홍대의 클럽이었다. 그곳에서 찧고 노는 사람들이 실은 남보다 훨씬 많은 걸 고민하고 삶의 많은 부분을 앞서 챙긴다는 걸 목격하고 또 감명했다. 이 영화는 이 둘의 주제를 멋지게 이어준다. 80년대 이전, 무게잡는 노래들의 전사(前史)가 무엇인지 일러주고, 유쾌함이 어떤 토대 위에 서서 웃고 있는지를 시종 보여준다. 무게잡음과 쾌활함의 내력을 설명받는 마지막 슬로비디오 씬의 감동은 기막히고 살벌했던 어제와 여전히 건재한, 업수이 볼 수 없는 오늘의 쾌활함이 겹쳐지며 단정하게 절정으로 오른다.

70년대의 문화기반이 얼마나 구렸는지에 대한 묘사는 기대했던 것만큼 노골적이다. 보는 내내 너무 쪽팔렸으며, 당연했던 우리의 과거가 얼마나 우울한 것인지를 깨우쳐준다. 재밌는 부분은, 그에 대비된 데블스의 '세련됨'이 모두 기지촌의 그것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너절한 기지촌의 묘사에 그것보다 객관적으로 더 구린 70년대 대한민국 서울의 문화가 얹혀진다. 미군 기지의 그늘이었던 기지촌의 비참함과 70년대 대한민국 문화의 비참함을 노골적으로 비교하는 장면에서 음악쟁이들이 직면해야했던 고민의 한 자락이 살풋 제 모습을 드러낸다. 미8군의 음지에서 경험한 미국 문화의 보편적 우수함(!)을 이렇게 자연스레 그려낸 작품도 나로선 처음이다.

노래쟁이들을 위한 만가로 손색이 없다. 문샤이너스는 이번에 제대로된 영화를 만났다. 드러머 손경호씨가 나오는 첫 장면은 내내 발을 구르며 웃었다. 조승우의 보컬은 출중하고, 세션들의 연주력은 그보다 조금 더 맛깔스럽다. 신민아의 연기와 춤도 시의적절하게 배치되어 빛난다. 이 영화의 모델이 된 데블스는 실존했던 밴드이다.

by cryingkid | 2008/10/03 13:24 | 짤방 | 트랙백 | 덧글(0)

연애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 이유

- 연애하는 사람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 이유



한때 절친했던 99학번 여자 선배 중에 연애 시작한 후배들을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누나가 있었다. 연애 시작한 사람들은 얼굴부터가 다르다는 게 그 누나의 주장이었는데, 이제 나도 들어오는 신병의 애인 유무를 얼굴만 보고도 알아맞히는 경지에 이르고 나니 그 말이 일리가 있는 얘기였구나 싶다.

일단 연애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대하는 선이 분명하고,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이름모를 확신 같은 게 배어나온다. 챙길 사람이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를 위해 결단코 무너지지 않겠다는 강단, 늬들이 아무리 발광하든 내 뒤엔 내가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무언의 아우라 같은 것. 물론 누구에게나 자기를 사랑해주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겠지만, 자기‘를’ 사랑해주는 가족과 자기‘가’ 사랑하는 애인은 분명 다른 개념이다. 그리고 그런 능동의 확신이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사람의 인상을 둥글게 만들어놓는다. 쾌활한 가운데서도 무언가 헛헛해보이는 구석이 사람마다 하나쯤은 있기 마련인데, 이 연애인戀愛人들은 좀체 그런 구석이 안 보인다. 정서의 등뼈가 갖춰진 모습이랄까. 온갖 갈굼 속에도 그의 낯빛만은 번드르하고, 예기치 못한 대응에도 빨리 자신을 찾으며, 누구도 침범치 못하는 생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채워놓은 듯 삶의 중심을 잘 잡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물론, 이 모든 건 무당이 제 손님 아들 뱄다고 우길 때 쓰는 화법과 유사하므로 객관적인 근거 따위는 쥐뿔 없다. 또 알고보니 그렇더라는, 나중에 끼워맞춘 게 너무 티나는 거 아니냐는 혐의에도 그닥 자유롭지 못하고, 뭐 내가 무당이 아닌 다음에야 별로 자유롭고 싶은 생각도 없다. 더구나 수천년 동안 주워섬겨온 ‘알고보니 운명이어써’ 타령으로도 역겨워 죽겠는데 이젠 아예 증명할 길도 없는 인상으로 ‘연애인’의 우성형질까지 찾으려 드느냐는 몇몇 사람들의 우생학적 히스테리에 대해서도 별로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실은 나야말로 연애에 적합한, 경쟁력있는 인격 같은 거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고 앞으로 그걸 갖추고픈 의사는 더더욱 없는 연애 무경험자 & 반골주의자라는 것만 밝혀두고 싶다. 다만 전국민의 대다수가 이렇게 연애에 미쳐 날뛰고 있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예전부터 했었고, 그게 ‘흐흐 너도 해보면 알아’ 따위의, 첫경험 치르고 난 고딩들이 시시덕댈 때나 쓰일 그런 멘트 말고 좀 ‘말이 되는’ 방식으로 설명될 길은 없을까를 늘상 고민해 왔다면 고민해 왔다는 정도다.



흔히 빈정 상한다는 말을 많이들 쓴다. 이 사람 마음이란 게 알고 보면 앞뒤 계산이 정확해서, 기쁜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그걸 드러내려고 하고 상처가 있으면 어떻게든 그걸 화풀이하려고 든다. 물론 개중에 엄청나게 큰 상처를 받고도 종교에 귀의하여 그것들 모두 나빌레라 하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그건 한마디로 변태적인 경우고 그걸 정상으로 생각하고 인생 살다간 원인모를 스트레스에 정신병원 신세를 지는 수가 있다. 그만큼 이 마음이란게 우리는 몰라도 그 속으로 차고 더는 게 의외로 칼같다는 걸 해가 갈수록 깨닫는다. 그래서 뭔가 원인 모를 조울증이 지루하게 반복될라치면 혹 자기 마음속의 감정구조가 착취적이지는 않은가 한번쯤 되새겨보는 게 도움이 된다. 쉽게 말해 빈정 상할 일들을 미연에 줄여 두는 게 원만하고 명랑한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연애니 가족이니 하는 인간관계가 사람에게 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경제적으로 줄 수 있게 만드는 체제 같단 생각이 자꾸 든다.

참고로 나는 이때까지 친구사이 중 몇몇을 거의 연애에 필적하는 관계로 특화시키는 방법으로 내 감정여닫음을 조절해왔는데, 요즘 들어 그것이 매우 소모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선 그런 관계는 유지보수가 어렵고, 정이 집중되는 만큼 그 뿌리를 찾지 못하고 쉬이 흩어지기 쉽다. 흔히 친분의 근거가 되는 공동의 경험은 가면 갈수록 자리가 줄고, 과거 파먹는 것도 일이년이면 식상하다. 그리고 있는 대로 정 퍼주는 것도 있을 때 일이지, 날이 갈수록 그 샘이 점점 말라감은 물론, 복학하고 취업이다 직장이다 해서 정신없이 바빠지게 되면 퍼주고 싶어도 시간 없어서 못 퍼주는 사태가 틀림없이 불거질 것이다.

더욱이 나는 사람들과의 친분을 잴 때 서로간의 약점이 얼마나 허심탄회하게 나눠질 수 있는가를 종종 기준으로 삼는데, 내가 마더 데레사나 한비야 같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내 경험의 궤적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분양할 수 있는 마음의 평수는 한정되어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내가 애초에 빈틈이 많고 자기 절제가 안돼서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바보’로 캐릭터라이즈시킴으로써, 내 빈틈을 잘라파는 것으로 인간관계를 이어나간다고 해도, 그게 가면 갈수록 소모적일뿐더러 남에게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신의 약점을 안 보여주는 게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필요한 외피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글을 쓸 때도 맨 살갗을 그대로 내보이기보다는 어떤 스타일을 갖추어 드러내는 것이 내면의 샘을 퍼내는 데 장기적으로 유리하듯이, 굳이 약점을 쉽게 드러내지 않더라도 자기의 겉과 속 사이의 층을 두텁게 만들고 그 층들 사이에 사람을 들게 하는 것이 곧 인간관계의 기술이 아닐까, 비밀과 약점을 쉽게 내다팔다 내면을 쉬이 바닥내기보다는, 약점을 안 보여주면서 최대한 경제적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게 나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현명한 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놈의 약점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자연히 가까운 몇몇 사람으로 점점 한정되는, 그리고 그것이 종내엔 가족이나 연인의 테두리로 굳어지게 되는 게 자연스런 추세가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제 마음 속이 정을 함부로 퍼줘도 상관없는 화수분이 아닌 다음에야, 결국은 애인이나 가족같은 ‘전형’에 포섭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자기 정쏟음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해온 게 연애고 가족관계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예전에 제 여자친구에만 제 속을 다 털어주고 다른 사람에겐 ‘친구’라는 선을 칼같이 긋던, 사람에 대한 우선순위를 명확히 두는 치들이 못내 미웠었는데, 그런 그들의 처세엔 그렇게 이유가 있었음을 깨달아가고 있다. 당장에 나라도 그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만 붙잡다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타인의 우선순위에서 점점 멀어지는 제 자신만 목격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히는 걸 봐도 그렇다.

해서, 역시 연애만이 살길이다. 사람에게 정을 주고 그 정을 온전히 돌려받는 것만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다. 그것을 위해서는 사람에게 무작위로 뻗치는 정을 효과적으로 관리해주는 인간관계의 틀이 필요한데, 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정 주고 돌려받는 기쁨들을 효과적으로 추수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낯빛이 그리 두둑할 수 있었던 게다. 맨땅에 씨뿌리는 거랑 이랑 지어넣고 씨뿌리는 거랑 추수의 기쁨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남들 다 하는 것에는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꼭 이렇게 당연한 소리를 일부러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늦봄에 노망나는 소리 죄송하다. - 20060512, cryingk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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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니 참 재수없는 글이다.
무엇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게 어떤 건지를 잘 보여주는 글인데, 또 머리로 이해하는 단계가 필요하긴 또 필요한 것도 사실이긴 하다.

by cryingkid | 2008/10/01 11:27 |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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