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매'가 낳는 '심리'적 세계관 : <에반게리온> 다시보기 by cryingkid



- 서른의 눈으로 보는 [에반게리온]

서른 살에 [에반게리온]을 보니, 이 설정과 내러티브가 갖는 일본적 특수성이 눈에 밟힌다. 파일럿과 병기의 관계, 병기와 적의 병기와의 관계, 적이 상정하는 목표, 사도가 네르프를 공격하는 방식 등이 모두 '심리'와 직접적으로 연결돼있다. 즉 심리를 무기로 삼아야 하고, 심리의 집중도가 전투의 승패를 좌지우지하고, 나아가 심리와 심리와의 충돌이 곧 전쟁이라는 설정이 스토리의 큰 줄기가 된다.

기실 [에반게리온] 스토리의 깊이가 여기서 나온다. 레이, 아스카, 신지를 통해 묘사되는 인간의 심리와 존재조건에 관한 수상들은 이 애니가 그토록 많은 매니아를 양산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애니가 상정하는 거대한 세계관은 곧 사춘기인 주인공 세 명의 '심리' 세계에 다름아니며, 10-20대의 젊은이가 내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전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이는 여타의 SF 성장소설들이 곧잘 구사하는 전략이기도 하며, 실제로 10대의 유년기에 필요한 세계의 상상이 그마만큼이기도 하다.

하지만 심리의 영역이 그처럼 심원한 것이라고 해도, 그걸 정치나 전쟁의 핵심 원리로 정초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이 애니를 '성장소설'이나 '소년의 내면'을 넘어선 '정치'와 '전쟁'의 틀로 읽었을 때 제기되는 문제들이다. 가령, [에반게리온]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적의 실체와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운명과 같은 미지의 세력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는 사명을 강조한다. 더불어 전쟁 또한 '인간 조건'과 '심리' 세계의 연장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런 인식 속에서는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이 원천적으로 무의미해진다. 이런 일련의 것들이 '전쟁'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기초적인 사고틀과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에반게리온]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심리'적 세계관이 갖는 문제다.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에바들이 사도에게 공격을 받을 때 '폭력'과 '가까이 다가가고 싶음'이 중첩된 형태로 묘사되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심리적 유대가 전제된 폭력'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매' 담론과 유사하다. 가령, '사랑의 매'를 휘두르는 선생과 제자 사이에는 도저한 '심리적' 유대가 전제된다. 때리는 '매'가 심지어 '사랑'일 수 있다는 건, '사제'관계에서도 '신체적 구속'이 합당하다는 전제를 뜻하고, 때리고 맞을 때 느끼게 되는 심리적 구속을 직접적으로 '교학'에 이용하겠다는 선언이 된다. 마치 에바와 에바의 파일럿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에바 '조종'의 핵심 메커니즘인 것처럼.

만일 인권단체가 그런 교학의 방법이 부당하다고 지적한다면, 그들은 필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적질이라는 반응을 보이게 될 게다. 그도 그럴 것이, 인권의 눈으로 보면 애초 그런 체벌로 인한 심리적 구속 자체가 개인의 존엄에 해당하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심리'의 영역에 부당하게 개입하는 것으로 보일 테고, 따라서 '사랑의 매'의 눈으로 보면 '인권'의 주장은 마땅히 써먹어도 될 것들을 바보같이, 혹은 '잘 알지도 못하기에' 못 써먹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고로 '사랑의 매'는 자연히 '인권'이 뭔가 구체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처럼, 심리를 써먹고 써먹혀본 이들은 곧잘 정치나 합리가 '성기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은 '혼'으로 귀결되고, 그 '심리'의 원리 안에서 레벨을 나누고 하이어라키를 만들며, 그 하이어라키의 세계에 정치나 합리의 요소들이 개입할 여지는 점차 줄어든다. 에바를 공격하는 사도의 '전쟁'에 '합리적 이유'를 찾기 어려운 것처럼. '사랑의 매'에 '인권'이 개입하기 어려운 것처럼. 민주화 정권은 뭔가 해해 풀어진 반면 박정희 때는 딱 타이트해서 좋았다고 말하는 어른들에게, '인권 보호를 위해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언술이 먹혀들지 않는 것처럼.

인권은 말하자면 개인의 존엄과 사회의 구성이 최소한 합리적으로 지켜지기 위해 그어놓은 선이다. 심리로 구축된 세계는 그 기준선을 보란듯이 비웃고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어떤 목적을 향해 투신하게 만든다. 물론 '인권'이 인간의 조건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틀리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인간의 조건에 근접한 어떤 기제를 곧바로 세계관으로 직결시키는 것이 아름다워보이는 유혹은 경계해야 한다. 대동아전쟁 때 서구 근대의 대안으로 일본이 만들고자 한 '화혼', '충성과 미'의 세계관 아래 위안부가 끌려갔다. 또는 가까운 예를 들면, '심리'가 공공연히 써먹고 써먹힐 수 있는 하이어라키의 세상에서 인간의 존재 조건을 극한까지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이근안을 들 수 있다. 이근안만큼 인간의 '심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사람이 있었을까.



[에반게리온]처럼 세계의 핵심 원리를 심리로 점철하고 그것으로 우열을 매기는 세계관은 의외로 현실 사회의 많은 곳에서 관찰된다. 서두에서 보았듯, 심리로 설명되는 세계는 인간의 존재 조건과 맞물려 참으로 심원한 감상과 통찰을 자아내지만, 그런 풍부한 향취와 감상이 암암리에 박멸하고 있는, 심리로 연역해서는 안될 정치와 사회의 부분에 대해 보다 민감해질 필요가 있는 이유다.

또한 사춘기 소년이나 자폐증 환자가 그렇듯, 한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풍요를 세기에도 마땅히 평생이 모자랄 수 있지만, 그 세계가 짙고 아름다울수록 주위의 산천초목이 잘 보이지 않을 수가 있다. 심리 세계의 낭만만큼 자기 자리를 잘 찾아야 하는 것도 드물다. 나이듦에 따라 챙겨야 할 대표적인 격률이다.


"저는 제 부모님의 쾌락 중에 태어났습니다." by cryingkid

정녕 저는 죄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를 배었습니다.
- 시편 51장 7절.


옛날 사람에게도, 사람이 섹스로 태어난다는 건 얼마나 외상스러운 일이었을까. 그래서 섹스스럽지 않은, 짐승스럽지 않은 세계를 구상해낸 게 천국이고 뭐 그런 게 아니었을까. 천국은 섹스는 확실히 없는 세상일 거야. 그건 섹스가 더럽거나 금지되어야 해서나 그런 걸 떠나서 그게 그만큼 골치아프고, 무섭고, 사람을 들었다놨다 하기 때문이었을 거야.

포유류가 발정기가 따로 있고, 후배위만 가능해서 성감의 추가발달이 제한돼있다면, 사람은 직립보행을 하면서 성기가 앞으로 가게 됐고 따라서 정상위가 가능하게 됐고 직립보행을 하고서부터 앞몸을 애무해야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입 안의 속살이 바깥으로 나오게 된 게 입술이라는 설명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지. 성이 생식이 아니라 쾌락으로도 전치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건.

저는 제 부모님의 쾌락 중에 태어났습니다, 가 사실 사람에게 가장 외상적인 게 아닐까. 성교육이 곤혹스러워하는 가장 중요한 꼭지일 테고. 그리고 어느 부모든 그런 기원을, 그들이 스스로 성을 알 때까지는 자식에게 숨기려고 하겠지. 왜냐하면 그들도 대개 홀로 성을 알아왔거나, 자기가 어떻게 성을 알아오게 됐는지 반추하기 어려워할 테니까. 성을 알아가는 건 어느 세대건 숨은 비의같은 게 아니었을까. 난 내가 성을 알아갔던 과정들이 생각해보면 참 끔찍하거든.

어쩌면 그랬을 거야. 천국을 꿈꾼 사람들은. 세상이 사정 후처럼 정갈해지기를 바랬을 거야. 세균 하나 없는 천국의 관념론 아래엔 모순덩어리인 섹슈얼리티의 고통이 있었을 거야. 그렇게 사람은 누구나 영과 육을 한 몸으로 아파하는 게 아닐까. 티없는 신성과 음모덮인 인성을 함께 고민하도록 태어난 존재들이 아닐까.


"예수 스스로 한 궁중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한 나라의 중심인 수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지방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융C.G.Jung은 우리 자신은 하느님이 탄생하시고자 하는 하나의 마구간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내면은 마구간과 같이 매우 지저분하다. 우리 스스로는 하느님께 보여드릴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우리가 가난하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고자 하신다."
- 안셀름 그륀/마인라드 두프너, <아래로부터의 영성>(분도,1999), 28-29쪽.


별이 멈추고 동방박사의 발이 멎고 예수가 태어나던 그 마구간 바로 옆 칸에는 샅처럼 축축하고 처연한 한 귀퉁이 속에 나귀들이 교미를 하거나 수태를 하며 포유류의 운명을 서로 곁눈질하고 쓰다듬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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