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2018) by cryingkid


조인성이 연기를 못하는 건 온 천하가 다 아는 일인데, 그 낮은 기대치보다는 이 영화에서의 조인성은 나쁘지 않다. 조인성은 연기의 폭이 좁은 배우고, 그 좁은 폭을 감독과 작품이 어떻게 써먹느냐에 따라 연기의 퀄이 확확 달라진다. 잘 써먹힌 쪽이 <비열한 거리>라면, 전혀 안붙었던 쪽은 <쌍화점>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 영화에서의 그는 그래도 잘 써먹힌 쪽에 속한다. 작품이 기도하는 고구려 남성의 털털하고 투박한 멋과, 조인성의 뭔가 어긋난 듯한 연기가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이 영화는 어떠한 모험도 하지 않는다. 고구려가 안시성에서 당태종의 대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이순신의 전과처럼 전국민이 다 아는 이야기다. 영화는 그 전국민이 다 아는 이야기를 집요하게 훼손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한번쯤 실사의 형태로 보고 싶었던 고대의 활극을 구경하는 재미를 주는 반면, 누구나 아는 결말로 달려가기 때문에 액션의 긴장감이 극의 긴장감으로 옮겨가지 않는 문제가 있다. 물론 그 한계를 작품도 알고 있는 듯이, 액션 장면과 그것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외모를 담은 모든 씬은 최선을 다해 멋있게 촬영되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 중엔 영화에 대한 기대가 큰 사람도 있겠지만, 기대가 별반 크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거다. 천만 관객을 채우려면 후자의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코드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여기에 이 영화는 아예 노골적으로 후자의 사람들을 겨누고 기획되었다. 영화에 대해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는 평론가와 관객들은 이 영화를 좋아하기가 힘들 것이다. <명량>이 한국 박스오피스 역대 1위 작품인 것이 좀처럼 납득되지 않듯, 이 영화 또한 어쩌면 비슷한 이유로 관객이 많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따금 황당한 대사들과 고구려뽕의 신파들과 옥쇄의 설정들은 예상한 만큼 들어가 있지만, 그렇다고 결정적인 동티가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이 영화에 웰메이드를 기대했던 관객이 얼마나 있을까. 그래도 배우 얼굴을 뜯어먹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리얼>이나 <인랑>보다는 어쨌든 낫고, 그나마 다소 입체적인 인물을 연기하는 남주혁의 표정은 나름대로 훌륭하다. 아무런 서사적 재해석 없이 영화를 이렇게까지 끌고 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황망하고 또 되도록 권장되지 말아야 할 작풍이냐는 것관 별개로 그러하다.

[버닝](2018) : '이야기'를 통한 희망과 절망 by cryingkid




이 영화의 문법은 확연히 비대중적이고, 관객이 많이 안 들 것이며, 바로 그 부분이 영화제에서 각광받는 요소가 되리라 확신한다. 그 부분에 대해 두 가지만 짚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이 영화는 유아인의 1인칭 시점으로 일관하는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1인칭 시점의 주인공의 편을 결국 들어주지 않는다.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 외의 묘사가 이창동스럽지 않게 거의 전혀 없는 걸 이런 식으로 뒤집는 것은 꽤 흥미롭다. 가령 이 영화 속 유아인은 전형적인 수줍은 한남이고, 거기에 대고 누군가는 여혐의 맥락을 캐물을 수 있다. 헌데 정작 영화는 이 유아인에 대해 별반 동의하고 있지 않다. 이게 이 영화의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만약 마지막 10분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지나치게 브레히트적이거나, 프롤레타리아 서사에 가까웠을 것이다. 다행히 영화는 그런 길을 가지 않는다.

다음으로 이 영화의 핵심 서사는 '이야기' 자체를 비웃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는 이야기를 제멋대로 지어내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신기하게도 하나로 겹쳐지는 때가 있다. 그 남들의 이야기가 겹쳐지는 장소에서, 희한한 형태의 상황적 진리가 탄생한다. 음모론이 태어나는 이 전형적인 방식을 재현하는 감독의 의도는, 유아인의 부친을 현 MBC PD인 최승호로 캐스팅한 것에서 절정에 달한다. 시사프로의 PD야말로 이야기가 아닌 '사실' 그 자체에 집착하는 자이자, 역으로 그 사실을 결국 어떤 '이야기'를 통해 설명할 수밖에 없는 자다. 이 영화에는 그것을 포함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엄밀히 말하면 그 모든 '이야기'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무엇에도 현혹되지 말라'는 <곡성>의 그것을 많이 닮았다.

인간은 과연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인가. 이야기는 모름지기 재미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리를 머금고 있든 아니든, 그것은 재미있어야 이야기로서 값을 한다. 이 이야기의 무참함에 대해 이창동은 골몰했던 것 같다. 나홍진이 인간 스스로 '사실'을 감당할 수 없음에 골몰하여 <곡성>을 찍었다면, 이창동은 인간 스스로 그 '이야기'마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에 천착해 <버닝>을 찍었던 것 같다. 영화는 그 재미에 매개된 이야기가 얼마나 무참할 수 있는지를 차분히 그려낸다. 그리고 그 제재를 통해 스릴러 영화의 문법을 몸소 재구성한다.

그 어떤 인간의 그 어떤 슬픈 사연이라도, 사람은 그것을 재미로 소비할 수 있다는 걸 인간은 안다. 물론 그것들을 좀더 맘편히 소비할 수 있는 자들은, 이 사회의 성원권이 모름지기 잘 보장되는 이들일 것이다. 이성애자나, 남성이거나, 계급적으로 우위에 있는 이들이거나. 가령 이 영화에서 뭇사람들이 가장 통쾌해할 만한 묘사라면, 바로 그런 계급적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의 사연과 감정과 '이야기'들을 재미로 착취하는 광경일 것이다. 헌데 그 재미란 과연 나쁜 것인가. 거기서 영화는 한발짝 더 자기의 몸을 비튼다. 본디 돈없는 사람은 돈있는 자들의 어떤 면모를 유독 닮기를 원한다. 돈있는 자들이 취향을 쇼핑하듯이 취사선택하는 광경만큼, 돈없는 자들의 눈에 우아하고 매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그것을 할끔거리고, 또 그것을 혐오하다 종내엔 그것을 전유하고 복제하는 영화 속 유아인의 연기는 참으로 절륜하다.

결국 그 이야기의 환영 속에서 자기를 더 드러내야 하는 쪽은, 다시 말해 자기 이야기의 쿠세와 클리셰와 한계를 먼저 드러내야 할 쪽은, 이 이야기로 지어진 세상 속에서 끝내 실패한 것으로 판명된 자들의 몫이다. 인간은 이야기 속에서 희망을 얻고, 또 그 이야기 속에서 다시금 절망한다. 이야기를 만드는 장인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가 그처럼 얼마나 세계와 인간의 실존을 능멸할 수 있는지, 이창동은 뼈저리게 경험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이리도 이야기의 권능을 쳐부수는 메타적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창동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다분히 튀는 영화다. <밀양>이나 <시>에 나오는 희미하고 깊은 휴머니즘적 낙관이 이 영화에는 전혀 없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마냥 지독히 냉소적이고, 박찬욱마냥 감독이 그리고픈 훅에 크게 의존하며, 따라서 이따금 성긴 구석이 있다. 그 훅에 얼마만큼 이입할 수 있느냐에 따라 이 영화의 평판과 호불호가 결정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강남·외고 출신이 수다하게 널렸던 학부 입학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나는 그들이 얼마간 미웠고 얼마간 부러웠으며, 그들이 내 살아온 경험을 진기한 이야기로 소비하던 순간이 지금도 명징히 기억난다. 그리고 슬프게도 나는 서울에 살면서 그들의 어떤 면모를 천천히 닮기 시작했고, 급기야 사회적으로 고급한 코드가 묻어있는 파스타를 영화 속 스티브 연마냥 집에서 거뜬히 말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그렇게 스스로가 바뀌어오기까지 내가 기대왔었던 '이야기'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혹은 당신이 당신 삶을 버티게 만들었던 '이야기'는, 그것은 과연 윤리적인 무엇이었는가. 스티브 연의 백랍같은 얼굴과 유아인의 얼빠진 표정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내내 묻고 있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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