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2018) : '이야기'를 통한 희망과 절망 by cryingkid




이 영화의 문법은 확연히 비대중적이고, 관객이 많이 안 들 것이며, 바로 그 부분이 영화제에서 각광받는 요소가 되리라 확신한다. 그 부분에 대해 두 가지만 짚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이 영화는 유아인의 1인칭 시점으로 일관하는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1인칭 시점의 주인공의 편을 결국 들어주지 않는다.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 외의 묘사가 이창동스럽지 않게 거의 전혀 없는 걸 이런 식으로 뒤집는 것은 꽤 흥미롭다. 가령 이 영화 속 유아인은 전형적인 수줍은 한남이고, 거기에 대고 누군가는 여혐의 맥락을 캐물을 수 있다. 헌데 정작 영화는 이 유아인에 대해 별반 동의하고 있지 않다. 이게 이 영화의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만약 마지막 10분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지나치게 브레히트적이거나, 프롤레타리아 서사에 가까웠을 것이다. 다행히 영화는 그런 길을 가지 않는다.

다음으로 이 영화의 핵심 서사는 '이야기' 자체를 비웃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는 이야기를 제멋대로 지어내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신기하게도 하나로 겹쳐지는 때가 있다. 그 남들의 이야기가 겹쳐지는 장소에서, 희한한 형태의 상황적 진리가 탄생한다. 음모론이 태어나는 이 전형적인 방식을 재현하는 감독의 의도는, 유아인의 부친을 현 MBC PD인 최승호로 캐스팅한 것에서 절정에 달한다. 시사프로의 PD야말로 이야기가 아닌 '사실' 그 자체에 집착하는 자이자, 역으로 그 사실을 결국 어떤 '이야기'를 통해 설명할 수밖에 없는 자다. 이 영화에는 그것을 포함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엄밀히 말하면 그 모든 '이야기'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무엇에도 현혹되지 말라'는 <곡성>의 그것을 많이 닮았다.

인간은 과연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인가. 이야기는 모름지기 재미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리를 머금고 있든 아니든, 그것은 재미있어야 이야기로서 값을 한다. 이 이야기의 무참함에 대해 이창동은 골몰했던 것 같다. 나홍진이 인간 스스로 '사실'을 감당할 수 없음에 골몰하여 <곡성>을 찍었다면, 이창동은 인간 스스로 그 '이야기'마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에 천착해 <버닝>을 찍었던 것 같다. 영화는 그 재미에 매개된 이야기가 얼마나 무참할 수 있는지를 차분히 그려낸다. 그리고 그 제재를 통해 스릴러 영화의 문법을 몸소 재구성한다.

그 어떤 인간의 그 어떤 슬픈 사연이라도, 사람은 그것을 재미로 소비할 수 있다는 걸 인간은 안다. 물론 그것들을 좀더 맘편히 소비할 수 있는 자들은, 이 사회의 성원권이 모름지기 잘 보장되는 이들일 것이다. 이성애자나, 남성이거나, 계급적으로 우위에 있는 이들이거나. 가령 이 영화에서 뭇사람들이 가장 통쾌해할 만한 묘사라면, 바로 그런 계급적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의 사연과 감정과 '이야기'들을 재미로 착취하는 광경일 것이다. 헌데 그 재미란 과연 나쁜 것인가. 거기서 영화는 한발짝 더 자기의 몸을 비튼다. 본디 돈없는 사람은 돈있는 자들의 어떤 면모를 유독 닮기를 원한다. 돈있는 자들이 취향을 쇼핑하듯이 취사선택하는 광경만큼, 돈없는 자들의 눈에 우아하고 매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그것을 할끔거리고, 또 그것을 혐오하다 종내엔 그것을 전유하고 복제하는 영화 속 유아인의 연기는 참으로 절륜하다.

결국 그 이야기의 환영 속에서 자기를 더 드러내야 하는 쪽은, 다시 말해 자기 이야기의 쿠세와 클리셰와 한계를 먼저 드러내야 할 쪽은, 이 이야기로 지어진 세상 속에서 끝내 실패한 것으로 판명된 자들의 몫이다. 인간은 이야기 속에서 희망을 얻고, 또 그 이야기 속에서 다시금 절망한다. 이야기를 만드는 장인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가 그처럼 얼마나 세계와 인간의 실존을 능멸할 수 있는지, 이창동은 뼈저리게 경험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이리도 이야기의 권능을 쳐부수는 메타적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창동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다분히 튀는 영화다. <밀양>이나 <시>에 나오는 희미하고 깊은 휴머니즘적 낙관이 이 영화에는 전혀 없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마냥 지독히 냉소적이고, 박찬욱마냥 감독이 그리고픈 훅에 크게 의존하며, 따라서 이따금 성긴 구석이 있다. 그 훅에 얼마만큼 이입할 수 있느냐에 따라 이 영화의 평판과 호불호가 결정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강남·외고 출신이 수다하게 널렸던 학부 입학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나는 그들이 얼마간 미웠고 얼마간 부러웠으며, 그들이 내 살아온 경험을 진기한 이야기로 소비하던 순간이 지금도 명징히 기억난다. 그리고 슬프게도 나는 서울에 살면서 그들의 어떤 면모를 천천히 닮기 시작했고, 급기야 사회적으로 고급한 코드가 묻어있는 파스타를 영화 속 스티브 연마냥 집에서 거뜬히 말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그렇게 스스로가 바뀌어오기까지 내가 기대왔었던 '이야기'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혹은 당신이 당신 삶을 버티게 만들었던 '이야기'는, 그것은 과연 윤리적인 무엇이었는가. 스티브 연의 백랍같은 얼굴과 유아인의 얼빠진 표정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내내 묻고 있는 질문이다.

1년만의 일기 by cryingkid

모순 이후의, 양면성 이후의 윤리, 내 것이 아닌 상태 이후의 방책, 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알아채고, 우회하지 않는 것, 구체의 디테일을 구체적인 순간에 포착해내기, 칼같이 정확한 실천, 생산성을 잃지 않는 것. 요새의 내게 필요한 것들이다. 그로부터 글과 학술과 인생의 화두의 일치를 다시 꿈꾸어봐야겠다. 내 영역, 내 고민의 밀도를 지키는 일을 다시 손대야 하겠다. 가령, <일대종사> 감상평에서 내가 썼던, "무얼 원하고 원하지 않았는지 구별할 수 없을 때에, 비로소 그들은 자신의 세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문장은 비겁한 문장이다. 그 이해의 요체가 무엇인지 대답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과 바라지 않음이 공존하는 형태는 문학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얼마든 가능하나, 그 이후의 '이해'가 정녕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저 언명 속에 비어있다.

어떤 뜻이 무너진 이후의 세계를 온전히 폐허란 말로 수습할 수 없다. 거기엔 설명을 기다리는 다른 뜻이 도사리고 있고, 그 얼룩덜룩함을 효과적으로 공글릴 만한 언어를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우리를 잊고, 세월이 세월을 잊고, 또 그 잊음이 마땅했던 자리에 비로소 꽃핀 서정"에서 중요한 건 두 가지다. 자신을 되살리고 기억하는 상태도 서정일 수 있지만, 자신을 잊은 피동과 능동의 상태 또한 서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체의 힘줌을 통해 빽빽히 꾸려진 어떤 축적으로 드러나기 어려울 뿐이다. 빽빽히 묘사하기 어렵다 해서 묘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차라리 왜 듬성듬성한가, 를 통해 얻어질 어떤 사유의 단초들이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빽빽한 것이 어딘가 우세스러운 세상 안에 대충 솎인 듯 서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보다 힘있게 껴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주마간산의 실존이, 단지 개인적 문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떤 동시대성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격한 근대화, 빠른 체제교체, 뒤집히는 문화 속에서 휘날려가는 개인의 취향과 계층과 밥줄이 과연 빽빽함을 용인했을까. 사랑도 슬픔도 세월도 내 것이 아니었던 사람들의 군상은 차라리 보편적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세월과 감정이 내 것이 아닌 채 살아야 하는 이들, 연명의 일상이 무엇을 잊고 무엇으로부터 겨우 놓여난 것이었는지" 체감해야 했던 이들은 차라리 대다수가 아니었을까. 그러면 그 고민에 주박되었던 나는 용케 혼자가 아닌 게 되고, 그 고민을 공유했을 시절도 결국은 혼자가 아닌 게 된다. 개인의 고민에 동시대성과 역사성을 '분별있게' 부여하는 작업이야말로 자아와 학술의 연장에 값하는 일이다.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 어려움을 넘어,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 왠지 죄스럽다는 느낌. 끊임없는 정신없음으로 사람과 취향 사이를 부유하는 것이 차라리 안전할지 모른다는 느낌. "반쯤" 잊어버리고 "반쯤" 진심인 채로, 어느 것에도 깊이 삼투되지 않고 반만 발담근 채로, 그 "반쪽"들의 정치와 순위와 분별의 악무한으로 세월을 낙관하는 것이야말로 차라리 독단을 피할 방법인 것만 같은 느낌.
모든 느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만 그것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묘사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이유를 넘어서는 관점이 있어야 한다. 교조와 폭력은 척결의 대상이 아니라 운용의 대상인 것처럼 맥빠진 다원주의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집중이 죄스러울 수 있음을 알고서 부리는 집중, 교조와 다원관 양 극단의 무저갱을 알고 그 가운뎃거리에 처하는 지혜, 죽을 것을 알고 오늘을 사는 삶이 바로 그런 결단을 닮았다. 어떤 어지러움이 끝내 비정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세심하게 말하는 것은 애정이 필요한 일이다. 어떤 어두움이 끝내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어루만지며 사는 삶은 강단이 필요한 일이다. 죽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싸워 이겨야 한다. 없애는 것과 이기는 것은 다르다. 이 시대의 정신없음 또한 이겨야 할 적수이지 말살해야 할 제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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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게 이기는 것일까? 어째서 세심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어째서 그런 신경줄 거친 과정을 통해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을 껴안아야만 하는 것일까? 어째서 복잡한 것만이 우월한 것일까?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칼에 자르는 진리의 직면만이 이 시대의 처방인 것은 아닐까? 조금만 복잡하게 사랑하자는 구호가 얼마나 대중적일 수 있을 것이며, 애초에 왜 인간은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가? 어째서 먼저 사랑하는 것이 이기는 것인가?

솔직히 알 수 없다. 확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 맞는 길이라는 예감과 확신이 있다. 먼저 꼼꼼히 사랑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렇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생래적 허무보다 그 편이 훨씬 아랫목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밥을 짓고 국을 안치듯, 처음부터 맛있게 만들 아무런 이유가 없는 음식의 간을 공글리듯,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마음 놓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있는지 왜 존재하는지 모르는 아픔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를 무위로 돌리는 방법 외에 그 아픔을 껴안는 방법은 상대방에게서 내 존재를 온전히 용인받는 것 이외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게 이기는 걸까? 자신이 여기에 존재해야 할 이유와, 남이 거기에 존재해야할 이유를 모두 엮어 한 언어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가 이긴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새로 태어남"의 조건이다. 글이든 관계든 영혼이든 세계이든, 존재가 어루만져진 사랑의 힘에서 창조의 권능이 나온다. 만져지지 못한 존재가 진물을 흘리면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거북등이 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존재가 자기를 버티기도 어려운 지경에 처하면 그렇게 된다. 만져지지 않으면, 존재는 그렇게 된다. 남은 커녕 제가 여기에 있어도 될 이유조차 잃어버린 존재는 아무 힘을 낼 수 없다.

이기지 못하고 지는 때가 많다. 추스르지 못하고 사는 삶조차 버거울 때가 많다. 대답이 뻔해서 대답이 되레 무의미해보인다. 그렇게 애초에 모든 뜻으로부터 미끄러진 삶인 것 같다가도, 어쩌다 꿈결처럼, 혹은 현실처럼 자신의 존재가 쓰다듬기는 그 느낌마저 내팽겨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느낌이 설령 우연한 것이라 해도, 그 우연 속에 깃든 온기마저 잘라낼 까닭은 없지 않은가. 존재하는 데 아무 이유가 없는 것처럼, 사랑에도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연거푸 지고 난 후의 이김은 그렇게 이유없이 나를 찾을 것이고 그것을 어둠의 연쇄를 빌미로 물리치는 일이야말로 제 삶의 연속을 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패배 앞에 무력하듯이, 사랑 앞에서도 무력하다. 패배 앞에 무력할 방법을 알면서, 사랑 앞에 무력할 방법을 몰라야 할 까닭이 없다.

무력한 몸으로 오는 사랑을 고스란히 입고 또 무력한 몸으로 그 사랑을 얼마간 나누어준다. 감정과 사태의 인과는 그 무력함 가운데의 한 발 한 발에서 나온다. 그것이 애초에 그럴싸하고 선험적인 인과와 달리 비끄러매지는 까닭은 그것이 허덕이는 실천을 통해 비로소 쟁취되기 때문이다. 그럴싸하고 선험적인 사랑의 인과와, 무력함 가운데 한번 짐지어보는 사랑의 인과는 같을 수 없다. 우리는 대체로 아름답고 미리 씌어진 옳음에 빗대 외롭고, 아무도 모르는 각자의 인과를 때로 가쁜 호흡으로 밟아나갈 뿐인 것이 존재의 해답을 모르는 자의 도리다.

어루만져지는 정한 느낌을 기억하며 또다른 누군가를 만져주는 것, 사랑의 이유를 캐물었는가? 무력한 몸이 너무도 푸른 꿈을 꾸고 있다. 무엇이 이기는 것인가? 무력한 몸이 무력한 몸에 어색하지 않은 마음을 지니는 것, 섣불리 지은 모든 예상 가능함 속에 수초처럼 내려닿는 어루만짐의 감각을 쳐내지 않는 것. 제 존재를 조금이라도 덜 아파하는 것. 그리하여 무언가를 새로 지을 힘을 내는 것. 그로부터 자신이 새로 지어질 기회를 갖는 것. 그럼으로써 나를 보는 남들에게 진짜 희망을 주는 것. 그렇게 나를 통해 남을 어루만지는 것, 사랑을 나누는 것. 그렇게 꼼꼼히, 먼저 사랑하는 것. 그것이다. - 2013.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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