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6월 06일
한승수 국무총리와 총학생회장단의 토론회

1.
한승수 국무총리가 연세대를 찾았다. 전경도 사복경찰도 없는 혈혈단신이었다. 30여개 대학 총학생회장이 모인 자리였다. 행사장 뒤 촛불을 크게 인쇄한 걸개엔 "한승수 국무총리와의 대학생과 시국토론" 이라고 큼지막하게 써있었다.
총학생회장들의 발언이 시작됐다. 질의의 50%는, 집회 시의 '구호'와 동일했다. 발화의 형식이 아니라, 그 내용의 측면을 이르는 것이다. 총회장들은 팩트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거나, 시위판에 하루만 와도 알 수준의 정보를 늘어놓았고, '브레이크 고장이면 폐차' 같은 비유가 난무했다. 팩트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총리 얘기가 검증이 안되고, 검증되지 않은 얘기를 총리가 중언부언 반복하고, 그에 대한 '구호'를 총회장 측에서 중언부언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총회장 측이 "사는 사람은 우린데 왜 사들여오냐"는 의미로 '소비자주권'을 이야기하면, 총리는 "먹기 싫으면 안 사면 그만아니냐'는 의미로 '소비자주권'을 이야기했다. 월령표시나 민간규제의 신뢰도를 따져물으면, '국민 안심할 때까지 꼭' 추적하겠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불법시위와 폭력진압에 관련해서, 총리는 5월 27일 이전의 '평화'적인 자리보전 시위로 돌아가줄 것을 요청했다. 시위가 난 이유에 대해서는 홍보가 부족해서라고 했고, 아직도 국민이 뭘 모르고 데모하는 것 같냐는 질문엔 국민들이 천천히 정부의 뜻을 알아갈 거라고 했다. 재협상은 국제법상 불가능하다고 했고, 협상 문건은 놔두고 내용을 최대한 바꿔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신문을 한 시간만 봐도 알 수 있을 이 예상된 답변에 총회장단이 내놓은 반박은, 어느 대 총회장인가가 외친 이 한 마디로 요약된다. "국민들이 싫어하는데, 왜 미친소 수입하려고 하십니까?"
이 행사의 취지가, 총리가 기습 주선한 이 자리를 총회장단 측에서 촛불의 열기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고 대충 얼버무리려는 데에 있었다면 칭찬해줄 수도 있다. 그야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뻔한 질의와 뻔한 응답을 주고 받았으니까. 하지만 내 눈엔 딱히 그래보이지 않았고, 노회한 국무총리 앞에서 총회장단의 철저한 아마추어리즘만 너절히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하다못해 정책국에서 하룻동안 두 명만 붙어도 짚어낼 수 있을 만큼 뻔한 답변에도 그네들은 '구호'로 일관했다. '구호'는 나쁜 게 아니지만, 그 자리에 피케팅 하는 사람도 아니고 총리를 대동하고 토론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구호'를 반복하는 건 직무유기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의 말은 관변단체나 관제야당의 기계적인 반박성명을 줄기차게 듣는 기분이었다. 고로 재미가 없었고, 덕분에 참다못한 사회자가 자꾸 끼어들었고, 끼어드는 순간마다 나는 참담하게 시원했다.
이야깃거리가 될만한 팩트는 되레 청중들 사이에서 나왔다. 위험이 있는 쇠고기는 결국 하층민에게 돌아가지 않느냐는, 값싼 미국쇠고기와 양극화 문제를 연계한 논점이 나왔고, 이에 총리는 쌩뚱맞게 미측에서 FTA 손해라는 것보면 한국에는 이익 아니겠냐는 대답을 내놨다. 이윽고 - 그 팩트가 제대로된 것이냐를 접어두고라도 일단 팩트를 통해 뭘 주장하려 했다는 점에서, 고려대 여학생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관중의 낯뜨거운 갈채를 끌어냈다.
물론, 촛불을 든 모든 시민들이 사안에 얽힌 실무를 모두 꿰어야 할 의무는 없다. 나는 그런 식의 사고를 경멸한다. 뭘 몰라도 '감'은 있는 사람들, 정의에 대한 법적 근거는 몰라도 정의'감'은 있는 사람들, 그네들의 직관이나 '분위기 파악'도 나는 '실무'나 '법리'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중에 어느 누군가는, 실무를 챙겨야 한다. 누구 말마따나, 집회 선동과 대오 통제와 그를 통한 가시적 성과 못지 않게 그를 뒷받침하는 대항 논리, 그를 뒷받침할 팩트를 연구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리고 오늘 자리는 최소한 그 '실무'를 공부한 사람이 여럿 있었어야 했고, 그 결과는 인터넷 서핑 하루로도 짐작할 수 있는 답변에 별반 대응을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래부터는, 연세대학교 학생인 제 개인적인 경험에 치우쳐 서술되었을 수 있습니다.)
2.
어제 광화문 앞은 수십기의 깃발이 섰다.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의 깃발들이었다. 대학들의 실력 행사 치곤 타이밍이 너무 늦은 셈이기도 했기에, 4,5년 전과 동일한 낯익은 풍경이 되레 낯설어보였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99년-03년 보급곡인가를 불렀고, 율동을 추고, 구호를 외쳤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생소한 몸짓에 신기하게 웃어보였고, 나는 낯익고도 낯선 그 풍경들이 반갑기도 했고, 징그럽기도 했다.
이미 그런 것들 하나 남지 않은, 96년의 화를 입은 탓인지 이한열 선배의 저주를 입은 탓인지, 학회가 사라지고 노래패가 깨지고 율동패가 공중분해된 연대는 어쩌면 "바위처럼을 다함께 부르면 의식있는 대학생이 된다"는 명제의 쓰린 뒤끝을 가장 먼저 맛본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올해 연대 총학은 선거 유세기간 '학생권'을, 선거 전날 '비운동권'을 표방하며 당선되었다. 재미있던 것은, 복고풍으로 장엄했던 백몇십기의 깃발 사이 그냥 맨 시민들이 모였을 때와 가장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던 데가 바로 연대였다는 사실이다.
작년인가 재작년엔가, 어느 법대 모임에 초대된 전직 운동권 출신인 열린우리당 의원이 "우리는 현재의 학생운동권을 전혀 고려할만한 정치세력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고 밝혀 학생들의 반발을 샀다. 물론 그런 말을 해놓고 지금은 당 말아먹고 어딘가에 붙어있을 그가 더 안쓰러울 수는 있겠으나. 오늘 토론회에 모인 총학생회장들은, 발언으로만 놓고 봤을 때 청중들보다 시정없었고, 무지했다. 송지헌 아나운서와 총리 사이에서 알 수 없는 패기를 자랑해야 했던 그들은 뭔가 의무적으로 지속돼야 할 구체적이지 않은 도의를 십자가처럼 지고 있었고, 종내는 토론석에 앉은 그들이 측은해보였다. 물론 이상한 대통령 밑에서 더러는 옹호하고 더러는 뒷감당해야 할 총리가 그보다 측은할 수는 있겠으나.
고로 하고 싶은 말은 두 가지다.
1. 누구 말마따나 이 시위는, 실패하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 절대 이 시위의 선봉이 대학생이 돼선 안된다. 그들에겐 그럴 만한 역량이 없고, 그렇게 되면 모처럼 불거졌던 활력이 다시 박제돼버린다. 시민은 '그들에게' 조직될 필요가 없고, '그들에게' 조직되어서도 안된다. 여기서 방점은 '조직'이 아니라, '그들에게'에 있다. 그들의 바위처럼과 그들의 민가와 그들의 조직력을 대체할 만한 건, 이미 너무 많이 생겼다. 그건 이번 촛불시위를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물론 앞으론 더 다른 게 필요하겠지만, 그 대안이 최소한 '그들'은 아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반쯤 썩은 나무등걸을 지키고 있건, 어떤 말못할 마음이 구석으로 쌓여가건, 그런 그들에게 추도사를 읊기 전에, 시대가 거두지 않는 투사의 뒷녘을 기리기 전에, 이 시위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선봉에 나서면 안된다.
2. 공부합시다. 난 02년에 투쟁에 걸린 사안을 거의 실무자 수준으로 알고 있던 99학번을 기억합니다. 시절이 엄혹해진 탓도 있겠지만, 학생운동이 하나둘 상징으로 사라져간 건, '바위처럼'에 기댈 줄도 알면서 그렇게 '공부'도 하는 운동가가 하나둘 사라져갔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앞서 말했듯, 모든 시위대가 미친소 수입과 민영화의 실무적인 지식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만, '누군가'는 알아야 하고, 요즘은 그 '누군가'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3. 내일도 촛불문화제 갈 겁니다.
# by | 2008/06/06 21:20 | 글 | 트랙백(1)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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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cryingkid의 생각
대학생은 절대, 이 시위의 선봉에 서면 안된다....more
2. 그리고 토론회는 역시 예상대로였군요. 그래도 마음 한 켠에 파란을 기대했던 것이 살짝 민망할 정도로..
말 너무 잘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