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의 자유론 by cryingkid

역사에 기록된 경험 가운데 어떤 부분이 자신의 상황과 성격에 적절히 적용될 수 있는지는 '자기 자신'이 발견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전통과 관습은 어느 정도 그들이 그 경험에서 무엇을 배워왔는가에 대한 증거이며, 따라서 이러한 추정적 증거에 대하여 그가 존경을 표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첫째, (관습 속에서-인용자)그들의 경험이 좁은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거나, 혹은 그것들이 올바르게 해석되지 않았을 수 있다.
둘째, 경험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정확하나, '그'에게 적합하지 않을 수가 있다. 관습이란 통상적 상황과 통상적 성격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그의 상황과 성격이 '통상적'이지 않을 수 있다.
셋째, 비록 그 관습이 관습으로서는 좋은 것이고 그에게도 적절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그것이 관습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관습에 순응하거나 그가 지니는 인간의 재능과 자질이 교육되고 발달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 판단, 차별적 감정, 정신적 활동, 그리고 도덕적 선호도까지 포함한 인간의 능력은 어떠한 '선택'을 하는 데에서만 작동된다. 어떤 것이 관습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최선의 것을 판별하거나 요구하는 데에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한다. 육체적 힘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도덕적 힘은 사용할 때만 향상된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따라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믿기 때문에 따라 믿는 것처럼 재능이 요구되지 않는다. 만일 한 의견의 근거가 자신의 이성과 결정적으로 다르다면, 그가 그 근거를 채택함으로써 그의 이성은 강화될 수가 없고, 오히려 약화될 확률이 많다. 그리고 만일 행동을 하고자 하는 동기가 자신의 감정이나 성격과 일치되지 않는다면(다른 사람의 권리나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경우에), 그것은 그의 감정과 성격을 적극적이고 활기차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기가 없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데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

관습의 독재는 인류의 진보를 도처에서 지속적으로 방해함으로써, 관습적인 것보다 나은 어떤 것, 즉 상황에 따라서 자유의 정신, 혹은 진보나 개선의 정신이라 불리는 걸 지향하려는 성향과 끊임없이 적대한다. [...] 진보의 원칙은 [...] 관습의 지배에는 반대하는, 적어도 그 굴레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진보와 관습 간의 대립이 인류 역사의 주된 관심사를 이룬다. 더 적절하게 이야기한다면, 대부분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습의 독재가 완벽하기 때문이다. 동양 전체가 여기에 해당된다.

관습은 거기에서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 심판관이다. 정의와 권리는 관습에의 순응을 의미한다. 권력에 도취된 일부 폭군을 제외하고는, 관습의 논의에 저항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그 국민들도 한때는 독창성을 가졌음에 분명하다. 그들은 인구가 많고, 교육을 받고, 많은 생활 기술에 익숙한 기초 위에서부터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 이 모든 것을 만들어냈고, 그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한 국민들이었다. 지금 그들 동양인들은 어떤가? 장엄한 궁전과 화려한 사원을 지은 선조들을 둔 동양인이, 숲 속을 방황하던 선조들을 가졌지만 관습과 더불어 자유와 진보의 분할통치를 받았을 뿐인 서양인들의 피지배자, 혹은 예속민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에는 진보적이다가, 그 후에는 진보를 중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보는 언제 중단되는가? 그것이 개별성을 보유하는 것을 중지하는 순간이 바로 그 때이다. [...] 우리가 맞서서 싸우려는 것은 바로 개별성이다. 우리 모두가 서로 동일한 인간으로 만들어지게 된다면, 우리는 기적적인 일을 해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닮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기 유형의 불완전성과 다른 사람의 우월성에 대해서, 혹은 양자의 장점을 결합함으로써 각자 보다 나은 어떤 것을 창출할 가능성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일반적으로 가장 우선해야 할 주요한 점이라는 것을 망각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중국에서 하나의 잘못된 전례를 보게 된다. 중국은 가장 개화된 유럽인조차도 어느 정도는 현인과 철학자의 칭호를 수여치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이룩한 얼마간의 업적이, 일련의 아주 좋은 관습과 더불어, 고대에서 제공되었던 보기 드문 행운 때문에, 많은 재능을 비롯해 어떤 점에서는 지혜까지도 겸비한 사람들이 많았던 나라다. 그들이 소유한 최고의 지혜를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주지시키면서, 대부분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명예와 권력의 위치를 차지하게끔 보장하는 탁월한 제도적 장치를 가졌다는 점에서도, 역시 중국인들은 대단한 국민이었다. 확실히 이러한 일을 해냈던 사람들은 인간 진보의 비밀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세계의 움직임의 선두 위치를 지속적으로 확보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들은 정체되었고, 수천 년 동안 그러해왔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좀더 발전된 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외국인에 의해 된 것임에 틀림없다. 영국의 박애주의자들이 그다지도 부지런하게 하려던 작업, 즉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만들고, 그들의 생각과 행위가 동일한 격률과 규범에 의해 규제되게 만드는 작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 중국인들은 모든 희망을 능가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앞서 말한 대로이다. 공공 여론이라는 근대적 제도는 중국의 교육적, 정치적 체제가 조직적인 형태로 하던 것을 비조직적 형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개별성이 이 굴레에 대항하여 자신을 성공적으로 주장할 수 없게 된다면, 유럽도 그 고귀한 선현과 기독교 신앙에도 불구하고 제2의 중국이 되기 쉬울 것이다.

: 존 스튜어트 밀, 김형철 역, 『자유론』(서광사,2008), 107-108,126-129쪽.




(문단갈이는 인용자, 작은 따옴표 강조도 인용자,
직역이랍시고 좆같이 번역된 거 다듬은 부분도 인용자.)

1.

공부를 하기로 하면서 몇 정리해 둔 것이 있다. 그중 첫째가 가족 문제였는데, 내가 나고 자란 곳의 '분위기'를 따르면 나는 당연히 집에 돈을 벌어줘야 하고, 연봉 3천 이상 되는 직장에 취직하여 집살 돈을 모아야 하며, 서른 중반이 되기 전에 필히 결혼을 하여 '불효'를 끼쳐드리지 않아야 했다. 내가 공부를 하기로 한 것은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하겠다는 뜻이 된다. 누구나 그렇듯 난 불효자가 되기 싫었고, 대학원 진학 전 이 문제가 가장 나를 괴롭혔다.

장고 끝에 마침내 내린 결론은, "내 할 일을 제쳐두고 하는 효도는 '효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또 커오면서부터 자기 가족을 위해 평생을 바쳤노라는 어른들이 만년에 얼마나 큰 공허감을 맛보는지를 보았다. 그들은 자기 인생을 잃어버린, 말하자면 불행한 효자였다. 난 그게 싫었다. 그게 싫어서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지금은 어떻게 잘 마무리되었다. 평소에 당신은 그리 못하셨더라도 우리는 꼭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라고 말로라도 당부하셨던 부모님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하단 말씀 전해드린다.


2.

살면서 느끼는 거지만, 우리나라는 불문율이 참 많다. 분위기를 잘 타야 하고, 눈치를 잘 봐야 한다. 빛을 보지 않는, 보기 싫어하는 음습한 격률들이 도처에 안개처럼 가득하다. 물론 나도 거기에 몸맞추고 눈맞춰 지금껏 살아왔다. 어떤 조직에 들어가서 조직 안의 분위기를 '주도'도 해보고, 몇 년이 흐른 후 그 조직을 내 손으로 깨면서 그런 분위기를 '저주'해보기도 했다. 그것들은 어느 켠에선 구멍난 사회의 복지망을 부드럽게 채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어느 켠에서는 할 걸 안해두고 구렁이 담넘듯 의뭉스레 넘어가서는 어느새 당사자의 목을 죄어오기도 한다. '분위기'만큼 모호하게 가치중립적인 말도 없을 것이다. 한국인 누구나 그 '분위기'의 시혜자고,또 그 '분위기'의 피해자가 된다. 피해가 벌어질 때마다 타격점은 없거나, 너무 많이 생긴다.


3.

마루야마 마사오의 [초국가주의자의 논리와 심리]를 보면 일본군 전범 재판에서 태평양 전쟁을 벌인 자가 누구냐고 추궁하는 부분이 나온다. 군 수뇌부에 있던 이들은 다들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발뺌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런 결정으로 몰아가는 어떤 '대세'가 있었다고 진술한다. 흐름이 이미 그렇게 돼가고 있었고, 자기는 그런 흐름에 동참했을 뿐이라는 식이다.
난 저 대목을 보면서, 어쩌면 5.18때 대체 누가 공수부대를 파견했는지 아직 모르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당시 군부 내 분위기는 저 빨갱이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밀어버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고, 수뇌부들은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그같은 살육을 벌였던 게 아닌가. 그리하여 마침내는 정말로 누가 도장을 찍었는지, 그들 스스로조차 잊어버렸던 게 아닌가.


4.

동양을 비판하는, 혹은 비하하는 서양의 저작물에 '오리엔탈리즘'이란 껍데기가 붙어온지도 벌써 반세기다. 물론 그들이 서양 스스로를 알았던 것처럼 동양을 알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좀더 나아가, 그럴 의무가 그들에겐 없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서양 고금의 고전이 전달하는 동양에 대한 이미지가 때론 불쾌하다. 그 불쾌함에 답하고자, 공부를 하려고 한다. 그 중에 내가 가장 한스러운 것은, 동양이, 한국이 아직 서양의 그것에 필적할 만큼 제 스스로를 설명할 개념틀을 제대로 짜놓지 못했다는 데 있다. 밀이 위에서 이야기한 중국의 정체론은 분명 동양 사회의 역동성을 간과한 부분이 있다. 현대의 많은 동양학자와 국학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이 글을 읽고 묘한 아픔에 젖는다. 과연 저 말을 부인할 수 있을까. 국민 스스로 서로가 서로에게 똑같길 원하는, 그놈의 그 '평등'지수가 그렇게 높아서, 그것의 허구를 깨어밝히는 최소한의 틀인 "계급"조차 먹히지 않는 이 "대동단결판"에서, 우리는 무엇을 변명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저 말을 비웃을 수 있을만큼 그 '분위기' 속에 행복한가.

혹여 그 지적이 서구중심적이라면, 과연 우리는 그놈의 '분위기'로 연역해낼 수 있는 어떤 정치철학을, 어떤 체계를, 어떤 계보를 갖고 있는가. 서양이 싫으면 서양에 못지 않은 자기의 설명틀을 만들면 된다. 우리는 그에 대해 어떤 성취를 거두고 있는가. 그 결과가, 우리가 서구를 비웃을만큼 그토록 충분한가.


덧글

  • ysl 2015/05/16 10:27 # 삭제 답글

    글을 잘 쓰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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