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6월 13일
세대에 대한 책임
70년도 초반에는 아직 운동권 노래라고 할 만한 문화 현상은 성립되지 않고 있었다. [...] 시위의 방식이나 농성장의 분위기도 요즘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예컨대 시위나 연좌농성장의 한 구석에서 트럼프 판이 벌어질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터질 듯한 긴장감과 투쟁적 열기로 가득찬 요즘의 시위나 농성현장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 시위현장을 떠난 당시 대학생들의 사사로운 삶의 공간을 채워준 노래는 기존의 고급문화나 대중문화의 영역에 속한 것들이었다. 시위 장소에서 트럼프가 공존할 수 있었던 상황이 말해주듯 당시의 대학생들은 기존의 대중문화나 고급문화에 대해 지금(1988년-인용자)과 같은 정도의 비판적인 의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 70년대 초반의 이른바 통기타 선풍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
트럼프 문화가 통기타 문화가 시위문화와 공존할 수 있었던 70년대 전반의 분위기는 75년 긴급조치 9호의 발동을 전후로 하여 완전히 깨져 버렸다. 그와 같은 조짐은 71년의 위수령, 72년의 10월 유신, 74년의 긴급조치 4호와 민청학련 사건 등을 거치면서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상황이 경색됨에 따라 대학 내의 시위양태도 완전히 바뀌었다. 경찰이 노골적으로 대학 내에 상주하였고 시위의 기미가 보이는 즉시 투입되어 진압하였다. 탄압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많은 학생들이 시위 가담을 꺼리게 되었다. 시위의 주도자는 무론 단순가담자도 형사처벌과 함께 제적처리되기 일쑤였고 재입학도 불가능해졌다. 시위는 더 이상 '교양과목'이 될 수 없었다. [...]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고 정치 상황이 극도로 경직된 75년 이후의 교내 시위는 대개 10분 이내에 끝이 나는 식이었다. 주동자가 구호를 외치자마자 경찰차가 와서 주동자를 끌고 갔으며 일반 학생들은 경찰의 눈이 무서워 단순 가담조차 하지 못하고 그 광경을 그대로 보고만 있다가, 착잡한 심정으로 학교 앞 술집으로 몰려가곤 했다. 주동자들은 전단 백여 장과 5분 정도의 시위를 위해서 몇 달 동안이나 준비를 하였다. 시위나 농성은 단순히 논리적인 설득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설득도 필요한데, 이들의 짧은 시위는 그 자체로 강한 감정적인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이는 시위의 방법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경직된 상황 때문이었고, 또한 당시의 학생운동의 역량으로써 그러한 상황 하에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위형태였다.
그러나 80년의 봄은 달랐다. 학교 안에서만은 비교적 자유로이 집회와 시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유신 말기 시대와 같이 5분 동안의 시위로써는 대중들의 열기를 포용할 수도 없었고 또한 대중들을 설득할 수도 없었다. 오래 전에 학교를 떠났던 60년대 말 70년대 전반 학번들이 복교하여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총학생회의 구성은 물론 몇 달 동안의 학내 집회를 꾸려가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비교적 자유로운 공간에서 대규모 집회와 대중적 연설, 장기적인 싸움 등을 경험해 본 70년대 전반까지의 학번과, 체계적으로 사회과학지식은 획득하였으나 오랫동안 준비하여 단 몇 분 동안 기습적인 시위를 했던 긴급조치 시대의 세대들은 그 운동경험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강조-인용자)
이러한 능력부족으로 인한 진행의 미숙함, 지루함 등을 메워준 것이 노래와 시, 마당극이었다. 그리고 탈춤반이나 운동적인 연극반이 제대로 없어 마당극 공연이 어려운 학교에서는 노래와 시가 그 역할을 다하였다. 노래부르기와 시 낭송은 집회가 시작하기 전과 후, 정치적 연설 사이, 스크럼을 짜고 교내를 돌 때 등 거의 모든 집회에서 적절하게 사용되면서, 대중들의 정서를 통일하고 논리적 인식에 감정적 인식을 더하여 분위기를 고양시켰으며, 그 공감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 김창남, 이영미, <운동권 노래의 전개과정과 노래운동의 전망>,
《노래 3집 : 민족음악과 노래운동》 (이론과실천,1988), 112-118쪽.
트럼프 문화가 통기타 문화가 시위문화와 공존할 수 있었던 70년대 전반의 분위기는 75년 긴급조치 9호의 발동을 전후로 하여 완전히 깨져 버렸다. 그와 같은 조짐은 71년의 위수령, 72년의 10월 유신, 74년의 긴급조치 4호와 민청학련 사건 등을 거치면서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상황이 경색됨에 따라 대학 내의 시위양태도 완전히 바뀌었다. 경찰이 노골적으로 대학 내에 상주하였고 시위의 기미가 보이는 즉시 투입되어 진압하였다. 탄압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많은 학생들이 시위 가담을 꺼리게 되었다. 시위의 주도자는 무론 단순가담자도 형사처벌과 함께 제적처리되기 일쑤였고 재입학도 불가능해졌다. 시위는 더 이상 '교양과목'이 될 수 없었다. [...]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고 정치 상황이 극도로 경직된 75년 이후의 교내 시위는 대개 10분 이내에 끝이 나는 식이었다. 주동자가 구호를 외치자마자 경찰차가 와서 주동자를 끌고 갔으며 일반 학생들은 경찰의 눈이 무서워 단순 가담조차 하지 못하고 그 광경을 그대로 보고만 있다가, 착잡한 심정으로 학교 앞 술집으로 몰려가곤 했다. 주동자들은 전단 백여 장과 5분 정도의 시위를 위해서 몇 달 동안이나 준비를 하였다. 시위나 농성은 단순히 논리적인 설득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설득도 필요한데, 이들의 짧은 시위는 그 자체로 강한 감정적인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이는 시위의 방법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경직된 상황 때문이었고, 또한 당시의 학생운동의 역량으로써 그러한 상황 하에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위형태였다.
그러나 80년의 봄은 달랐다. 학교 안에서만은 비교적 자유로이 집회와 시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유신 말기 시대와 같이 5분 동안의 시위로써는 대중들의 열기를 포용할 수도 없었고 또한 대중들을 설득할 수도 없었다. 오래 전에 학교를 떠났던 60년대 말 70년대 전반 학번들이 복교하여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총학생회의 구성은 물론 몇 달 동안의 학내 집회를 꾸려가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비교적 자유로운 공간에서 대규모 집회와 대중적 연설, 장기적인 싸움 등을 경험해 본 70년대 전반까지의 학번과, 체계적으로 사회과학지식은 획득하였으나 오랫동안 준비하여 단 몇 분 동안 기습적인 시위를 했던 긴급조치 시대의 세대들은 그 운동경험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강조-인용자)
이러한 능력부족으로 인한 진행의 미숙함, 지루함 등을 메워준 것이 노래와 시, 마당극이었다. 그리고 탈춤반이나 운동적인 연극반이 제대로 없어 마당극 공연이 어려운 학교에서는 노래와 시가 그 역할을 다하였다. 노래부르기와 시 낭송은 집회가 시작하기 전과 후, 정치적 연설 사이, 스크럼을 짜고 교내를 돌 때 등 거의 모든 집회에서 적절하게 사용되면서, 대중들의 정서를 통일하고 논리적 인식에 감정적 인식을 더하여 분위기를 고양시켰으며, 그 공감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 김창남, 이영미, <운동권 노래의 전개과정과 노래운동의 전망>,
《노래 3집 : 민족음악과 노래운동》 (이론과실천,1988), 112-118쪽.
노무현 아래서 대학생활한 세대가
이명박 아래서 대학생활하는 세대에게 가져야 하는 책임감은 무엇일까.
386이 싫었던 건 그들이 벌써부터 원로 행세를 하려들었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그들과 같은 욕을 들을 일을 하고 있던 건 아니었나.
노무현이 죽고 난 후 2주일간 내가 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다.
# by | 2009/06/13 02:10 | 짤방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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