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의 손가락질

낙안면 희생사건

낙안면은 벌교와 인접해 있어 여순사건 당시 좌익과 반군의 활동이 활발했다. 낙안 지서와 면사무소가 수시로 습격을 당했고, 교전 과정에서 낙안읍성 낙민루가 소각되기도 했다. 신전마을 사건은 낙안면의 대표적인 집단희생사건이다. 빨치산을 보살펴주었다는 이유로 신전마을 주민 22명이 집단으로 사살됐다.

신전마을 사건

금산리 신전마을에서 15연대는 빨치산 소년 문홍주(14세)를 치료해줬다는 이유로 1949년 10월 8일(음 8.17) 마을주민 22명을 집단으로 사살하고 시신 및 가옥을 소각했다. 이른바 신전마을 사건이다.

참고인 손삼순, 홍동호, 장혹석, 김복심, 김이곤, 이형희, 정달막, 조선효의 진술을 종합하면, 1949년 상반기 쌍암(현 승주읍) 남정리 출신 소년 문홍주가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채, 빨치산들과 함게 신전마을로 내려왔다. 빨치산들은 문홍주를 마을주민들에게 맡기면서 제대로 치료해주지 않을 경우 가만두지 않겠다며 협박했다. 후환이 두렵기도 했고, 문홍주가 어려 안쓰러웠던 마을주민들은 십시일반 보살펴주었다. 사건관련 생존자 신청인 홍동호는 당시 마을에서 제일 형편이 나아 문홍주를 집에서 치료해주었다고 진술했다.

(...) 저희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께서 치료를 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절룩거리는 문홍주와 함께 (제가-인용자) 소를 몰러 같이 마을로 들어왔던 기억도 납니다. (...)


이후 총상이 다 나은 문홍주는 마을을 떠나 승주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조부를 만나러 관등마을을 지나다 동네아이들과 시비가 붙었다. 문홍주가 "홧김에 반군을 데려와 다 죽여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앞을 지나던 서정수가 그 얘길 듣고 문홍주를 끌고 와 경찰서에 넘겼다. 15연대는 문홍주를 취조 및 고문하여, 총상을 입고 내려운 신전마을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5연대는 문홍주를 신전마을로 끌고 가, 마을 주민들을 마을 공터로 소집했다. 군인들은 한 명이라도 도망가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주민들이 모이자, 군인들은 "이 마을이 빨갱이활동을 했고, 공산당을 도왔다"며, 구장을 비롯한 몇 명을 묶어놓고 마구 때렸다. 구장이었던 시아버지 위형량이 구타당하는 모습을 지켜 본 손삼순의 진술이다.

시아버님을 신작로 옆 또랑에 넘어뜨린 뒤에 총으로 질근질근 밟았어요. 총으로 마구 때렸지. 사정없이. 죽일 데가 어디에 있을 것이여. 끌어내면 살아. 기가 막혀.(한숨) 그리고 끌어낸 다음에 빨갱이 짓을 불으라고 했는데 뭐 한 일이 있어야지 불지. 그러니까 다시 또랑에 밀어 넣고 총으로 또 밟았어요. 그러고는 또다시 끌어내고 시아버님이 추우니까 피워논 모닥불 앞에서 벌벌 떨더라고.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어요. (...)


15연대는 문홍주에게 너를 치료해주고 보살펴준 이들을 지목하라며 개머리판으로 때렸다. 망설이던 문홍주는 자신을 치료해주고, 옷을 빨아주고, 약, 올벼쌀, 누룽지, 홍시감 등을 준 사람들을 지목했다. 문홍주의 '손가록 총'에서 학살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등에 업히기를 꺼려해 자신도 모르게 기적적으로 생존한, 신청인 홍동호의 진술이다.

1949년 음력 8월 17일 첫새벽에 군인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켜 앉혀놓고 신작로 옆 도랑에 2~3명을 넣어 밟으며 고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홍주를 데리고 등을 들고 집결한 마을 주민의 얼굴을 비추면서 마을 주민들을 가려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려낸 사람들을 부락에 들어가는 길 한쪽에 모아놓자, 먼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군인 지휘관이 가려낸 분들을 마을로 데리고 들어가라고 지시하는 소리를 들었고, 이에 군인들이 앞에서 인솔하고 뒤에서 밀어 이분들을 마을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이때 어머니께서는 당신 집이 불타지 않은 것을 보시고, 우리는 살게 되니까 등에 업고 집으로 가자 하시면서 업어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왜 그랬는지 모르게 어머니께 업히지 않겠다고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시 동이 틀 무렵 모닥불을 피워놓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입구 신작로에 계속 있었는데, 마을에 들어간 후 얼마 되지 않아, 10분도 안 돼서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고, 저희 집이 활활 불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동이 트고 환해지자, 제가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는 새까맣게 타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이 저희 집 마당에 널려 있었습니다. 3살 먹은 저의 동생은 타버린 상태에서 창자가 배 밖으로 터져 나온 상태였습니다. 부모님 시신의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에서 시신에 기름을 뿌리고 태운 것 같았습니다. 당시 집에 큰 개가 있었는데, 시신을 뜻어먹고 있어서, 그 개를 다른 마을로 줘버렸습니다.


또랑 옆 구멍에 숨어 간신히 살아난 신청인 손삼순은 당시 마을에 교전이나 좌우익 갈등은 없었다며 "단지 그 문홍주라는 애를 치료해준 게 죄라면 죄"라고 말했다. 손삼순의 진술이다.

근데 자식 같은 애를 부모심정에서 어떻게 나 몰라라 할 것이요. (...) 동네 학교 뒤편 신작로로 마을사람들을 모았어요. 몇 명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모아놓고 문홍주가 마을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누구는 감을 주고, 누구는 밥을 주고, 누구는 뭐해주고 그러면서 발로 차서 사람들을 골라냈어요.


강재수, 강옥순, 김대례, 홍목침, 정선례, 홍일순, 홍재호, 위형량, 조정순, 이삭심, 김용기, 이공월, 강양수, 조성림, 정달막, 조선효, 박옥란, 이장순 등 지목된 22명은 빨치산으로 몰려 마을에서 제일 큰 홍동호의 집에서 집단으로 사살됐다.

홍목침, 정선례 부부는 세살짜리 아들 홍재호와 딸 홍일순과 함께 불타 죽었다. 특히 강재수, 강옥순, 김대례와 조성림, 정달막, 조선효, 손삼순도 한 식구였다. 아버지는 약을, 어머니는 올벼쌀을, 딸은 누룽지를, 아들은 홍시를 주었다고 죽였다. 고모는 빨래를, 삼촌은 잠잘 방을 줬다고 죽였다. 조정순은 4살배기 딸 이삭심을 등에 업은 채 총을 맞았다. 엄마 품에서 젖을 빨던 갓난 아들도 함께 즉사했다. 이장순과 박옥란은 모녀 사이였다. 1948년 11월 30일 머슴 찾으러 집 밖에 나선 이장순의 시아버지 박노은을 토벌대가 반군으로 여겨 사살한 일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죽은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손삼순의 이어지는 진술이다.

자기들은 안 죽을라고 싸우고 안 다녀요. 우리도 살라도 걔를 치료해준 것인데 안 도와주면 죽인다고 해서 말이시. 살라면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데.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조사도 안하고 죽인 것이 말이 되냐 말이여. 무슨 죄가 있으면 피해불지, 나왔겄소. 죄가 없는 나를 어쩌겠냐는 생각에 나온 것이제. 그때는 경찰들도 산에 들어가기 겁을 냈어요. 산사람들 때문에 무서워서. 경찰도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지냈겠소. 말 한마디라도 거역하면 죽음을 당하는데 어찌 살겠소.


신전마을 주민들을 사살한 토벌대는 시신 위에 기름을 뿌리고 집에 불을 붙였다. 참고인이자 신청인 손삼순은 "살아남은 주민들은 넋을 잃었다"며, "시신 타는 냄새가 하늘을 덮었다"고 말했다. 32가구가 살던 신전마을은 어느새 잿더미로 변했다. 참고인 장홍석은 "한동안 옆 마을 사람들이 시신 타는 냄새에 먼 길을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순천지역 여순사건」,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 599-6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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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남한의 모든 국민들은
용케 빨갱이가 아닌 죄로 살아남았다.
남한의 모든 국민적 정체성에는
빨갱이의 피가 묻어있다.
 
빨갱이는 비단 북한을 가리키지 않는다.
빨갱이는 저렇게 동네 싸움이 고문으로 번진
한 아이의 '손가락질'이다.
그것은 애초에 '이념' 조차 못되었던 것이다.

by cryingkid | 2009/07/28 14:00 | 짤방 | 트랙백(1)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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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동쪽의 아레스실버 at 2009/07/30 17:41

제목 : 어쩔 수 없었다 論
한 아이의 손가락질 위 사건의 기사를 실은 중앙일보 웹에 달린 덧글의 반응 상당수가 '어쩔 수 없었다'더라는 덧글을 보고 연상되는 것이 있어 트랙백. 일본인들이 일제시대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아니, 2ch의 강경혐한파와 보수언론, 정치인들 시각 말고. 그러니까 그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조선인은 우리가 발전시켰다.', '조선인은 지배 당하기 마땅했다.' 이런 사람 같지 않은 시각 말고. 좀 양식......more

Commented by 피쉬 at 2009/07/30 15:58
중앙일보 덧글들 보면 이런걸
'살처분' 그러니까 가축전염병을 막기 위해 죽이는 그런식의 행위로 이야기를 합니다 옹호하는거죠.. 어쩔수 없었다는식으로
Commented by AlexMahone at 2009/07/30 16:28
어휴~ 섬뜩합니다. 순박한 시골 주민들이 무신 죄가 있다고 ....


사람보다 반공이라는 이념이 먼저인 사회... 개인적으로는 무섭네요..
Commented by 루치까 at 2009/07/30 16:32
생존자들이 짊어져야 했던, 그리고 은폐해야 했던 기억의 무게는 누가 보상해야 할까요. 제주 4.3, 여수-순천 10.17, 그리고 보도연맹 사건들이 '홀로코스트'에 해당하는 지는 논란이 치열합니다만 전 개인적으로 이것이 홀로코스트의 범주에 속하는 대량학살이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진주여 at 2009/07/30 16:49
근데 왜 빨치산이라고 죽여야 했던걸까요.....
Commented by SoulbomB at 2009/07/30 16:58
다 권력에 미친 개쇅들 완장차려고 했던 앞잡이 짓거리일 뿐.

만약 북한이 이겼으면 마찬가지로 앞잡이하며 민주주의 외치는 사람들 쏴죽였을 놈들.

인간이 참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돈키호테 at 2009/07/30 19:33
그 당시 명령을 내렸고 시행했던 사람들을 처벌할 순 없는 걸까요?
Commented by 함부르거 at 2009/07/30 21:16
지금 나라 돌아가는 꼴 보면 저런 일이 언제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요... ㅠ.ㅠ
Commented by 명랑이 at 2009/07/30 21:29
그게 목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Commented by 미스트 at 2009/07/31 00:08
사상과 이념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학살들....
Commented by 크로이 at 2009/07/31 03:06
무섭네요... 맹목적인 이념
Commented by 노바 at 2009/07/31 08:07
기도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Commented by qws2 at 2009/08/02 11:12
레포트 자료 조사하다가 자기계발서 찍어내는 걸로 유명한 공병호도 경영계였던가 그 잡지에서 이념은 먹고사는 문제보다 중요하다는 기고문을 올려서 벙쪘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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