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2016) by cryingkid


1.

결정적으로 영화가 실화보다 재미없다. 이건 치명적인 문제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은 퍽이나 다른 나라다. 대한제국의 백성과 대한민국의 인민이 같을 리가 없다. 아무리 이승만이 개같은 새끼라도 조선왕조노릇하는 것들보단 나을 수 있단 얘기다. 그처럼 시대엔 롤백할 수 없는 게 있다. 왕가에 대한 이상한 동경들이 있는 사람들에게 한번씩 하는 얘기가 있는데, 고종왕가.. 아니 황제의 가족사진을 보기 바란다. 쫄보도 그런 쫄보들이 없다. 그자들의 얼굴은 조금도 왕가의 위신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그처럼 저 왕가는 자신을 시대에 맞추는 데에 실패했다. 일례로 영화 속에서 복순을 끌어내니 아무 것도 못하는 덕혜옹주를 보라. 한 나라의 왕족이란 자가 봉건적 관계로 이어진 아랫사람 하나가 없어지니 할 줄 아는 게 없지 않은가. 중세 왕족은 실은 이미 정신병에 걸리기 전부터 저리도 시대의 기준으로 미쳐있던 자였다. 저런 자들의 '대한제국'이 '내 나라'라고? 제정신인가?
물론 근대란 참으로 슬픈 것이다. 자기에게 맞는건지 어쩐지도 모르고 일단은 맞추어야 했던 게 근대고 그래서 그만큼 폭력적이며 그만큼 좋은 것만이 아닌 것이다. 초가집보다 스레트집이 꼭 좋아서 바꾼 게 아니고 왕 모시다가 5년에 한번 대통령 뽑아 모시는 게 좋아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게 아니듯이 근대란 게 본래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왕가에겐 나라 뺏긴 설움만큼이나, 세상이 자기들보다 빨리 변하는 저 근대의 물결이 더욱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그 점이 훨씬 극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비슷한 시대의 비슷한 주제로 왕가위의 <일대종사>만 봐도 그 점이 너무 절절히 드러나는데 말이다.

고종과 덕혜옹주와 명성황후 등속이 마치 '내 나라'의 이야기처럼 비감을 자아내도록 하는 근저에는, 민족정체성의 내용에 대한 굉장히 큰 구멍이 자리해있다. 다시 말하지만, 근대의 맹아든지 내발이든지 그 속의 국가운영에 근대적으로 봐줄 무언가가 있든지 없든지, 대한제국은 근대의 나라가 아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건국의 시점이 그토록 '1919년'이어야 하는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고종의 인산은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발흥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만큼 사람이 모인 자리가 없었고 그걸 이용하려했던 지사들도 많았고, 무엇보다 근대와 전근대가 그렇게 칼지른듯이 나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그것의 의의는, 반복하듯이 '근대 민족운동'의 기치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지 무슨 '고대로부터 내려온 민족의 운동'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덕혜옹주가 친일논설을 접고 민족정서를 북돋는 연설을 하고 징용노동자들이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은, 조선인을 반쯤은 상찬한 것이지만 또 반쯤은 모욕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덕혜옹주가 친일논설을 혈연적 논리로 수락하는 장면은 차라리 친일논조로 끝까지 가는 게 더 극적이었을 것이다. 그게 일제하 이왕가의 입지와 보다 어울리는 묘사이기도 하고.

2.

요새 영화에서 일제 강점기 얘기가 꽤 자주 나온다. 재밌는 동향이다. 덕분에 한두편의 영화 빼고는 재앙에 가까운 발음의 일본어 대사를 들을 일 또한 많아졌지만.

영화에서 덕혜옹주가 일본의 음식이라는 이유로 생선회를 안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생선회는 조선에서도 먹었다. 일본문화가 전면 개방 되기 전에, 일본문화는 민족정체성을 위협하는 굉장한 악의 축이었다. 해방 후 많은 트롯 가요들이 왜색이란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이 맥락으로 영화에서 가장 재밌었던 것은, 이방자 여사가 일본인이기에 대한제국의 정통성에 어긋나므로 망명에 동참시킬 수 없다는 대사였다. 덕혜옹주와 이왕가의 이후 실제 삶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실소가 나오는 대목이라 하겠다. 내선결혼/국적법과 관련된 정연한 연구성과들이 떠오른다.

이 영화는 민족정체성이 얼마나 구성적인가를 더 보여줬어야 했다. 민족정체성은 곧 상상적 국민정체성이다. 민족과 국가가 어떻게 같냐고 얘기할 사람이 있겠는데, 모든 국가는 민족을 크게 이용하고, 한국은 그 이용함이 더 각별했을 뿐이다. 민족에 대한 이 시대의 가장 추악한 개념적 당착은, 민족정체성이 결코 국민정체성이 될 수 없다는 착각에서 나온다. 통일국가건 제국이건, 분단 국가가 아닌 '진짜 있는' 국가의 국가정체성도 어차피 '상상'적이다.
따라서 최근 영화에 그려지는 일제 강점기와 일본에 대한 상상들은, 지금 여기의 국민정체성을 어떻게 다시 쌓을건가의 고민과 연결돼있다. 뭐 여기서부턴 나보다 백배 똑똑한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할말이 많을 것이고. 다만 민족을 범주로 한 분개(혹은 정동)는 생각 외로 힘이 없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국면을 너무 자주 맞아왔으며 앞으로 더욱 그럴 것이다. <암살>의 내러티브도 '국뽕'이란 소릴 듣는 세상이다.

역사적으로 바람직하단 것과 내러티브적으로 바람직하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인간에게 환상은 사실 만큼이나 존재론적으로 중요하다. 그 환상의 범주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하자면, 이 영화는 영화로 건드리기 힘든 깜냥의 이야기를 영화로 건드린 셈이 된다. 그리고 거기엔 일정한 관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영화에 댈 수 없을 정도로 시대의 복잡성을 훨씬 더 고려한 최인훈조차도, 물론 그의 작품은 지금도 멋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영화를 시대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영화더러 해결하라고 하는 부름은 이제 그만 종언을 좀 내렸으면 싶다. 영화는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제했을 때 이 영화에 남는 이야기의 가치는, 어쩌면 한 개인간의 사랑이나 혈육간의 정이란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보여주는 그 골계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3.

영화 대사로도 직접 나오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덕혜옹주를 망명시키기 위해, 있지도 않았던 운동세력의 아지트를 그리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물론 "실력양성"은 중요하고, 또 그건 그만큼 아무 것에나 갖다 붙는다. 실력이야 친일파들도 만만찮게 있었다. 실력이 있으면 아우슈비츠에서도, 신자유주의 구럭에서도 거뜬히 살아남을 수 있다. 이렇게 복벽주의적인 영화를 통틀어 희한하게 현대적이었던 장면이 저것이었다. 근대가 그러하듯이, 온갖 수치와 영욕으로 가득찬 현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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