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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는 건전가요였다

1. 동기

민중가요 노래패를 없앤 게 2007년의 일이다. 더이상 창작되지도 않고, 위악적으로 구린 미디반주를 가사만 기려 좋아해줄 사람도 드물었고, 무엇보다 그 모든 악조건을 선배의 악마적인 사회성으로 버텨내라고 후배에게 강요하는 게 비매너라는 공감대가 있었다. 현직에 있는 애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20년전 노래를 재탕만 하는 건 직무유기다, 시대가 지나면 자연히 다른 것들이 생기겠지, 당시엔 그런 바람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09년 MB 정권의 치하에서 민가는 다시 입에 쫙쫙 붙는 노래가 됐다. 시청광장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광야에서]와 [아침이슬]과 [흔들리지 않게]가 불렸다. 아연했다. 분명히 '간' 시대라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퇴행적인 '시대'가 화려하게 복귀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1,2년 앞을 읽지 못한 범부처럼 비참해졌다. 조직을 너무 빨리 없앤 걸까. 그 생각이 들고부터 공부가 되지 않았다. 공부는 씨발 노무현이 대통령이었을 때나 좀 맘편히 할 수 있는 거지 싶었다. 지금이라도 학부일에 뛰어들어 조직을 재건해볼까 싶기도 했다.

고민이 앞서면 글은 학술문이 되지 못하고 격문으로 흐른다. 탈식민주의 주제 기말레폿을 '민중가요'로 써제끼는 만행을 벌이고 나서야 나는 노래패 재건이라는 미련과 망령에서 적당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어쨌든 간 시대는 간 시대였고, 간 노래는 간 노래였다. 시대에 대한 성실함은 다른 방향으로 돌려짐이 옳았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래의 글과 인용은 그 병리에 대한 짧은 기록이다.


2. 장르의 보수성

민중가요의 탄생은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70년대의 민중가요는 외국의 저항 포크 음악과, 해방신학열풍에 힘입은 성가 풍의 곡에서 딴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당시 장년층 취향의 왜색 트로트 중심이었던 대중가요에 저항해 포크 음악이 청년 문화의 기수로 여겨지고 있던 사정과 맞물린다.

그러던 것이 80년대에 들어오면서 민가에 단조 이지리스닝이 도입되는데, 이는 5-60년대 대중가요의 작법이기도 하면서 행진곡 풍의 '군가' 양식을 빈 것이었다. 민가와 군가를 다 아는 사람 중에 둘이 비슷하단 걸 발견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곡의 양식이 대중적이었던 만큼, 이 노래들은 학생들과 노동자 등 전 계층을 그런대로 아우를 수 있었다. 더불어 이 시기에는 70년대 포크 기반의 민중가요들이 지나치게 지식인스럽고 내면으로 침잠해있으며 민중에 천착하지 못한 엘리트 취향조라고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다 198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단조풍의 이지리스닝 곡들이 되레 '군가'스러우니 노래에 자연히 군사주의 이데올로기가 스며있고 또 왜색풍의 멜로디가 문제가 된다는 비판이 인다. 당시의 민중가요가 “가사 상으로는 현재의 지배질서를 부정하면서도 음악적으로는 그 지배질서 안에 있으면서 오히려 그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조성적 지배질서는 더욱 강화된다는 모순”(김창남)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운동가요의 세가 절정에 이르면서 그에 따른 성찰도 번다할 수 있었던, 한마디로 배가 불렀던 시절의 일환으로 읽힌다. 7년 뒤인 1993년 같은 평자는 다시 ‘대중’의 눈높이를 중시면서, 노동자들이 일상에서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를 모르고 민중운동을 전개해나가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제 주장을 뒤집는다.

이렇게 민중가요를 둘러싸고 특정 장르가 '반동'적이라는 논의는 줄기차게 이어지는데, 이는 팝을 대하는 태도에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다음을 보자.


3.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촉구한다

제게는 해방 후의 트위스트니 고고니 디스코니 하면서 리듬이 점차 빨라지고 있는 현상이 마치 제국주의 군대의 점점 빨라지는 발자욱 소리처럼 들립니다.
: 김창남 외, 《노래 1 : 진실의 노래와 거짓의 노래》(실천문학사,1984), 15쪽.

청음 능력이 퇴화되고 적절한 음악적 훈련의 기회를 박탈당한 오늘날 우리의 청소년들은 음악적 감수성이라는 면에 있어서 너무 ‘악마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음악적 감수성에 관한 한, 대다수 청소년들은 이미 ‘투항주의적’ 상태에 빠져 있는 게 사실이다. [...]
이제는 뒤에서 보면 도대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어려운 헤어스타일이 판을 친다. 귀를 드러내고 옆머리를 쳤다고 해서 “아하, 단정하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윗머리는 그야말로 거품처럼 부풀어있는 것이다. [...]
차마 해석하기도 곤란할 정도의 외설적인 노래가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 문제를 전담하고 있는 기구는 앞서 말한 방송심의위원회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애초의 설립의도에 비추어볼 때 제대로의 기능을 발휘하라고 요구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 이강숙 외, 《노래 2 : 인간을 위한 음악》(실천문학사,1986), 136-138쪽.

민중가요를 논하는 무크지에서 '심의'를 촉구하는 주장이 공공연히 개진되고 있다. 팝은 '악마적'이며 '투항주의적'이고 '외설'스러우며, 심지어 '제국주의 군대의 발자욱'과 비교된다. 물론 이 반대극항에 놓인 모범적인 사례가 '민중가요'임에는 틀림없다. 어차피 2000년에 들어서면서 민중가요는 팝적인 '세련됨'을 알아서 주워섬기기 시작한다. 위악적인 촌스러움을 견디기 어려웠던 까닭일 게다. 물론 촌스러운 것들도 감동적일 수 있지만, 촌스러움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이 '강제'되면 그때부터 정말로 구려지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런 것들이 본격적으로 구려지는 데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아래의 인용이 그 이유의 일부를 암시해준다.


4. 민간 주도의 건전가요

이 세 편의 건전가요는 공통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가사는 비논리적이거나 표피적으로만 건전할 뿐 그 깊이있는 진실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곡은 그나마의 가사도 제대로 살려주지 못하는 향락적인 곡들로 기존 대중가요의 곡의 분위기를 조금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 곡과 가사의 부조화문제는 우리 나라의 관 주도형 건전가요 풍토의 문제인 것이다. 건전가요라고 해서 항상 구태의연한 곡조로 지어져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랑, 이별을 떠들지 않고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건전한 노래들이 상업적인 대중가요가 아닌 자생적인 노래에서는 얼마든지 있다.
: 김창남 외, 《노래 1 : 진실의 노래와 거짓의 노래》(실천문학사,1984), 227-229쪽.

80년대 초의 대표적인 민중가요들이 실린 책에 함께 실린 글이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건전가요에 대한 문제의식이 호의적이고, 따라서 희박하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고 싶었던 건 '건전가요' 자체를 성찰하고자 함이 아니라, ‘관 주도 건전가요’를 뒤집은 ‘민간 주도 건전가요’였다는 심증이 가능해진다. 90년 이후의 민중가요 논자들이 “탈사랑타령의 가요”를 강조한 배면에 깔려있던 것도 말하자면 의사 ‘건전가요’의 형태로서 민중가요를 놓아두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민중가요는 [아, 대한민국] 만큼이나 '건전'해야 했던 것이다.


5. 공동체를 머리로만 생각하고

그렇다면 그들이 주장하고팠던 그 '건전'함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래를 보자.

땀흘려 일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로 머리를 굴려가며 사는 사람이 지식인들인지라 이들은 삶의 현장에서 겸허히 배우려는 자세보다는 책(그것도 주로 서양 것)에서 얻은 지식, 논리・개념으로 규정해버리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 공동체를 머리로만 생각하고 일방적으로 규정해버리는 경향이 강한 듯합니다. 또한 이들은 [...] 실상은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민중을 불신하며, 지식인적인 메시아 의식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 그러니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 노래동인 편, 《노래 3 : 민족음악과 노래운동》(이론과실천,1988), 235-6쪽.

이른바 "농경사회적 감수성"의 정수를 보는 것 같다. 잘라 말해 21세기 NL 운동권이 망했던 건 정확히 "공동체"를 "가슴"으로만 사고했기에 "인간과 민중"을 무조건 신뢰했고 따라서 "마음의 여유"가 흘러넘쳤으며, 따라서 종내엔 그 마음의 여유에 다른 "학우 대중"이 낄 자리가 끝내 사라졌기 때문이다. 김지하의 그 똘끼넘치는 '신명'론이니 "개벽, 생명의 부활, 민중 시대의 시작"이니 타령도 다 비슷한 맥락의 맹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흔히 이상향으로 그렸을 "마음의 여유"가 넘치는 중세적 풍경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당시에도 있었다. 80년대 유산이 최후까지 유의미하게 살아남은 분과가 맑스풍의 사회경제사, 경제구조 분석의 방법론을 취한 곳인데, 그들의 주장은 이러하다.

흔히 현대인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매우 긍정적인 생활처럼 묘사되는 ‘촌락공동체’의 실체는 생산력의 발달 단계상에 위치하는 한 과정이며 내부적인 조직으로는 가부장제적 혈연의 망에 근거하고 물적인 토대로는 토지를 지니되 그 지배의 형태가 계급체계에 의한 수탈이었다.
: 노래동인 편, 《노래 3 : 민족음악과 노래운동》(이론과실천,1988), 219쪽.



6. 단물 빠진 껌처럼

[...]스피박이 '단절 속의 반복'이라고 지칭하는 이러한 재생산의 위험은 저항 담론이 지배 담론의 역전에만 그치는 데서 비롯되며(이를테면, 오리엔탈리즘의 위계질서를 뒤바꾸려는 목적으로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 결국 저항 담론은 지배 담론의 논리에 여전히 갇혀 있는 꼴이 된다(《오리엔탈리즘》의 경우가 그렇다).
스피박은 역전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이 단계를 건너뛸 수는 없다─그 역전에는 반드시 대립항 자체의 해체가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거리두기가 보완되지 않으면 대립하는 두 입장은 끊임없이 서로를 정당화할 것이다".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스피박은 지배 담론에 맞대응하는 역헤게모니적 담론은 '치고 빠지는' 혹은 '마구 헤집고 다니는' 식의 게릴라전보다 오히려 지배 담론에 의해 상쇄되거나 재전유될 위험이 많다고 지적한다.
: 바트 무어-길버트,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한길사,2001), 210쪽.


탈식민주의의 시각은 "늬들(서구)이 제3세계의 난장판을 얼마나 아냐?"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흔히 '된장지랄'로 알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이 점이 다르다. "하위주체는 말할 수 없다"라는 말도, 한마디로 "프롤레타리아? 늬들이 없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아냐?"에서 출발한다. 탈식민주의의 많은 이론들은 강단 좌파나 지식인들이 다 수습해내지 못하는 '저항의 복잡다단한 현장'을 어떻게 설명하고 새길 것인가로부터 나온다. 그 현장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고, 그 복잡함을 알고서도 전술적으로 피아를 명확히 가르기 위해 저질러놓는 '구호'의 기반을 갉아먹는다.

하지만 탈식민주의는 "늬들(제3세계)이 늬들 사정에 제일 빠삭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는 태도 또한 함축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저항 주체의 본질론'이다. 물론 스피박도 '역전'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한다. 본질을 외치는 '구호'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순간에 이르러서는 우리에게 '민족'도 필요하고, '민중가요'도 필요하다. 다만 그것은 '일시적'으로 필요할 따름이요, 따라서 정세와 전략에 따라 쉬이 흩어지고 재조합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이를테면 '민족'이라는 구호가 있을 때, 그것이 그 효용을 넘어 진보적인 테제로 호도될 때 그 구호는 힘을 잃고 때로는 상대편에 전유되게 된다. 이를 스피박은 '단절 속의 반복'이라고 칭한다. 저항이, '운동권'이, '민노당 주사파'가 겪는 문제도 비슷하다.

'단절 속의 반복'이니 하는 '담론'의 이야기가 무슨 먼 나라의 이론 이야기 같지만, 이는 마치 단물 빠진 껌처럼 끈덕하게 닳은 ‘민중’이며 ‘운동’을 그들의 운동 속으로 감내해야 했던 또다른 담론적 ‘현실’ 그 자체였다. 이미 씌어진 몰락을 사는 기분, 21세기에서도 20년전 노래를 마르고 닳도록 부르는 것 외에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던, 20년된 운동 방략을 그대로 답습하는 외에 다른 길을 찾기 벅찼던 일들은 그대로 그 세대들에게는 '현실'이었다.

민중가요가 사멸한 것은 관 주도 건전가요가 사라진 다음에도 민간 주도적 건전가요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저항의 '양식'이 전유되었기 때문이다. 치고 나갔어야 한다. 이를 위해 스피박은 "전략적 본질론"이라는 걸 내놓는다. 이 말의 뜻은 이러하다. 첫째, 저항을 위해 상정되는 본질은 절대 영원하지 않다. '민족'이, '민중'이, '민중가요'가 영원하지 않듯이. 둘째, 그럼에도 본질이 필요한 타이밍이 있다. '민중가요'이 필요한 타이밍이 있듯이. 셋째, 그렇기 때문에 그 본질은 전략적으로 운용되어야 한다. 즉, 시효가 지나면 빨리 그 본질은 전략적 상황에 맞추어 다른 형태로 변해야 한다.

To discriminately dismiss the undongkwon's efforts in the minjung movement as yet another politically suspicious acts, predicated upon "a will to power" that is similar to the dominant state power, for example, is to dismiss the continued need for continues engagement in the changed era that has followed.(p.15)
: Namhee Lee, The Making of Minjung, Cornell University, 2007.

위의 인용에서도 알 수 있듯, 보통 탈식민주의에 쏟아지는 비판 중의 하나가, 그것이 자칫 친정부적인 행위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일지 모른다. 눈앞의 이명박 앞에서, 어찌 수단 방법을 가릴 것인가. 저 높은 차벽을 태우고 뛰어넘을 수 있는 건 과거의 가열찬 민청학련, 통선대의 대오 뿐이지 않겠는가. 이 시국에 무슨 놈의 성찰인가. 그 성찰이 지배 세력에 전유된 적이 어디 한두번이던가.

일리있는 대목이지만, 그것으로 문제를 덮어두기에 진보진영은 이미 너무나 많은 한계와 질곡을 드러내왔다. 성찰을 전유당하기 가장 쉬운 이 시대에, 이전 진보진영이 남기고 간 유산을 성찰해야 할 어려운 과제가 현 세대에 놓여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성찰을 전유당하기에 앞서, 성찰의 기회 자체를 전유당하는 것에도 마찬가지로 경계해야 한다. 종종 진보진영은 지배세력을 핑계삼아, 그들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성찰할 기회마저 지배 세력 탓으로 던져넣어 그들 스스로를 들여다볼 안목을 체계적으로 상실하고는 했다. 이기고 싶다면, 지배 세력보다 저항 세력이 더 빠르게 변화해야 한다. 더불어, 저항 세력 스스로 저도 모르게 물들어 있던 지배 세력의 포스를 스스로 적발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의 민중성을 "개벽, 생명의 부활, 민중 시대의 시작"으로 본질화하다보면 김지하처럼 된다. 지켜나가야 할 노래의 장르를 "반제국주의"로 치장하다보면 민중가요처럼 된다. 그것들은 영원토록 비빌 언덕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흩뜨리고 다시 쌓아야 할 모래성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밀물에 휩쓸릴 그 모래성을 그리느라 새 성을 쌓을 생각에 인색하면, 지게 된다.


7. 덧 : 별일없이 산다

한때 민가패였던 주제에 민가를 너무 깐 것 같다. 민중가요 베이스로 잘 트인 케이스를 하나 소개하겠다. 장기하가 속한 "붕가붕가레코드"의 전신은 "붕가붕가중창단"이었고, 이 붕가붕가중창단의 원년멤버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노래패인 서울대 "메아리" 출신이었다.

슬프니와 대갈은 대학 노래패 '메아리'의 일원이었다. 노래패에서 '미선이'의 '치질' 등 인디록밴드의 레파토리를 거의 처음으로 올려 파문을 일으킨 세대다. 이들은 이 때 노래패의 활동기수를 막 마치고 동기들과 함께 밴드를 만들려던 참이었다. [...] 깜악귀가 대학내 창작-구전가요의 보급과 엔터테인먼트를 목적으로 하는 '붕가붕가중창단'이라는 정체불명의 중창펑크 집단을 결성.
http://www.ssamnet.com/bandfile/banddetail.asp?pkey=50

(장기하) 내가 다닌 학교에 ‘붕가붕가 중창단’이 있었다. 학교 내의 행사나 집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게릴라 공연도 하고…… 게릴라성 노래집단이었는데, 거기에 지금 붕가붕가레코드의 곰사장, 내가 드러머로 있었던 ‘눈뜨고 코베인’과 ‘청년실업’의 이기타 등이 있었다. 그중에는 지금 사회인으로 사는 친구들도 있고. 그러다 ‘눈뜨고 코베인’ ‘그림자 궁전’의 송재경 씨와 같은 학교 밴드들이 주축이 되어서 『뺀드뺀드짠짠』이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을 냈는데 그때 참여한 사람들이 의기투합을 했다. 처음에는 일종의 캠퍼스 레이블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학교 내에서만 머무르지 말고 인디 레이블을 만들어보자. 그래서 ‘관악청년포크협의회’와 ‘청년실업’(『착각』)이 앨범을 냈다. 이것이 붕가붕가레코드의 시작이었다. ‘브로콜리 너마저’ ‘술탄 오브 더 디스코’(『여동생이 생겼어요』)가 들어왔고, 지금은 학교와는 별 관계 없는 하나의 인디레이블로 정착했다.
https://www.yes24.com/ChYes/ChyesView.aspx?title=003001&cont=3111

1981년 서울대학교 축제에서는 락밴드의 공연이 막걸리를 뿌리고 각목을 손에 쥔 운동권 학생들에게 제지당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그리고 2009년, 연세대 축제에서는 경찰홍보단이 등장해 거수경례와 함께 군무를 추고 노래를 불렀다.

"별일없이 산다"는 말은 한겨레나 경향에 의해 꼭 신영철이나 이건희에게나 해당될 헤드라인으로 주로 도용되고는 하지만, 내 보기에 저 말은 386 꼰대들에게도 그대로 반면교사가 될 말이다. '각'잡는 운동은 24시간 각잡지 못하겠는 여느 사람의 참여를 몰아낸다. '별일없이' 살 수 있을 만큼 건강해지기 위해 반백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후대의 '건강함'은 선대의 모든 '건강하지 않음' 앞에 굳건하다. 기실 '건강하지 않은' 선배들도 모두 그들의 희생으로 일궈놓은 판 위에서 "신나게, 별일없이" 놀아제끼는 현 세대의 난장질을 기다리고 있다.

내 또래들이 민가를 부르는 걸 유독 싫어하던 술집 사장이 있었다. 너희 시대에는 너희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지난날의 민가도 다만 그 시절의 사람들이 그 시절에 충실하고자 했던 데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가 우리 시대의 감수성에 집중해야 할 이유다. 과거의 노래로 현재의 감각을 직무유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시절이 뒤집어져 경찰홍보단이라는 괴기 단체가 무대 위를 '별일없이' 휘젓고 다닐 수 있게 될 동안, 저항 진영은, 또 우리는 당최 무얼 했는지 고민해봐야겠다.

by cryingkid | 2009/06/28 14:41 |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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