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국가
재일조선인과 국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탈민족이니 탈근대니 하는 논의에 어느 정도 반감을 갖고 있었다. 2000년 전후로 갑자기 대두된 저 담론은 그 대의에는 고개 끄덕이다가도 그 대안으로 (이승만도 외친)‘진정한 자유주의’등을 내놓는 대목이 뭔가 석연치 않았고, 이후 우파 논객들이 좌파의 민족주의적 편향을 지적하는 무기로 많이 사용하면서 그런 판단은 더 굳어졌다. ‘탈민족’은 마치 국내 기업에 취직하지 않아도 좋은, 몇 개 국어에 능통하여 외국계 기업에도 취직 가능한 몇몇 “세계화”의 총아들에게나 와닿을 담론 같았다. 그러던 터에 이 글을 읽게 되었고, 타의로 인해 ‘민족’에서 ‘이탈’되어본 사람들의 사례를 듣고서야 ‘탈민족’ 담론이 왜 필요한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생각을 다듬은 지금도, 탈민족이니 탈근대의 논의는 최소한 안락한 (분단)국가정체성을 바탕으로 세계화된 자본에 몸 기대어보려는 남한의 먹물들이 아니라, 탈'국가', 탈'민족'되었을 때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몸소 경험한 재일 동포들이 얘기해줘야 속칭 “플로우”가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1)
재일조선인
서경식 선생은 ‘난민’과 그들이 생각하는 ‘조국’의 의미를 새로 정립하려 애쓴다. 가령 난민은 “‘국민’과 언어를 달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언어관을 달리하는 존재라는” 대목이 그러하고, 또한 난민에게 있어 ‘조국’이란, “어떤 영역, 토지, 혈통, 혹은 고유의 문화나 전통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치적 조건들 아래서 선택되는, 미래를 향한 태도 결정을 가리킨다”는 대목이 그러하다. 이와 같은 강조는 난민이 겪고 있는 실존과 삶의 문제가 단순히 어느 국가로 포섭되어 해결될 수 없고, 지난 반세기동안 불완전한 분단체제에 있으면서 ‘국가’에 귀결될 수 없는 독특한 정체성을 재일 조선인 스스로가 갖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정체성은 단순한 고담준론의 영역이 아니라 그들의 ‘실존’에 얽힌 자못 진지한 것으로써, 서경식 선생은 동화 유대인의 예를 빌어 이 ‘포섭되기 어려운’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고발하고 있다. 독일 태생이지만 유대인인 이유로 수용소 경험을 했던, 종내에는 유대인도 독일인도 될 수 없었던 장 아메리나 파울 체란의 경우, 그들은 결국 유대인이 될 수도, 모국이되 자기를 압제한 독일의 국민이 될 수도 없는, 그 국가 정체성의 결락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재일 조선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기호이지 ‘국적’”이 될 수 없는 ‘조선’적을 가지고 우리의 조국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조선’”임을 외치는 그들 역시, 그들의 조국을 일본에서도,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찾지 못한 디아스포라의 한 전형이다. 재일조선인인 서경식 선생 스스로도 자살을 생각했던 적이 있다고 언급한 것을 떠올린다면, 이들의 정체성에 얽힌 고민은 국가의 틀거리 속에서 안락하게 살았던 사람들로서는 쉽게 짐작하기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다.
국가
“여기서 저의 주장은 재일조선인의 권리들을 반난민 상태인 채로 보장하라는 것입니다. 실제의 정책으로서는 조선반도의 남북의 국가는 ‘조선적’, ‘한국적’의 구별에 관계없이 재일조선인 전체에 대해 자유왕래의 권리를 보장해야 하며, 대통령 선거권 등의 국정 참정권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서경식, 본문 중)
이렇듯 재일조선인의 존재는 그 자체가 분단의 체현이며, 그 존재 자체로 운동성을 담지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이 아직 완전히 독립된 나라가 아니라는 걸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재일조선인이다. 서경식 선생이 “조선인은 근대 시기 내내 자신들이 온전히 동일화할 대상으로서 국가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완전히 ‘국민’이 되어본 경험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분단국가’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가장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재일조선인의 현실을 짚어낸 것이다. 특히 조국의 개념이 “미래를 향한 태도 결정”을 뜻한다는 대목에서 이러한 성격은 절정에 달해, 왜곡된 분단질서를 타개할 견인차의 역할이 이 한 단어에서 흡족히 연상되고, 조금 과장하자면 이 한 대목으로부터 통일운동의 ABC를 연역해내어볼 만하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흥성했던 통일운동의 성쇠를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견인차’를 올곧이 긍정적인 눈으로만 보기는 힘들다. 물론 2000년 6.15 공동선언의 가시적인 성과는 갈채받을 만한 것이지만, 대중이 생각하는 통일, 특히 통일운동에 대한 생각은 그리 긍정적이지가 못하다. 그 회의적인 여론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 바로 통일‘운동’의 지나친 ‘운동성’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가 외 장외투쟁을 지속한다고 해서 덮어놓고 상황이 호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범민련의 경우, 이 통일단체는 ‘국가’의 틀을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남측 지부와 북측 지부가 버젓이 있고,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이들 단체는 당연히 ‘이적 단체’가 된다. 비합법투쟁이 모조리 위험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탈국가 비합법 노선이 과연 여지껏 얼마나 실질적인 통일의 준비에 도움이 됐는지를 한번 냉철하게 따져보자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 해방 후 남북한은 “애매한” 국가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휴전’후 남북한은 지금까지 서로를 수복해야 할 영토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런 애매한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는 데 재일조선인의 비극이 있다. 이러한 바탕에서 서경식 선생의 주장은 “반난민”이라는 말을 통해, 이 “애매함” 속에서 근대 국가의 틀을 뛰어넘을 어떤 가능성을 보자는 입장인 것 같다. 하지만 내 짧은 사견으로는, 반대로 애매한 상태를 빌어 도용될 파괴적인 도착의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은가 생각한다. 분단국가의 불완전함을 빌어 국가를 뛰어넘자는 기획은 (물론 재일조선인보다는 남북한에 촛점을 맞춘 것이지만)이미 통일운동 측에서도 시도된 바 있다. 범민련이 그랬고, 범청학련이 그랬고, 한총련이 또 그러했다. 이런 시도들에게 현실적으로 작용한 것은 “국가”의 공권력이었다. 이들 단체가 지금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어뵌다. 국가의 틀이 희미해지는 “애매한” 상태는 그렇게 국가 공권력의 표적으로 점찍히기 가장 좋은 대상일 수 있다. 많은 유학생들이 간첩단으로 매도된 과거에도 그러했고, 한국에 입국한 재일조선인에게 감찰이 따라붙는 지금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렇게 “애매함”에 가해지는 폭력 뒤에는 말할 것도 없이 국가보안법으로 상징되는 냉전질서가 도사리고 있다. 어떤 재일조선인이 한국에 입국해 취직을 하려던 차, 사장이 그에게 ‘일본인’인 것처럼 행세해달라고 부탁하더라는 대목은 참 가슴시린 것이다. 그가 왜 그런 취급을 받았는지 생각해 볼 때, 남한 사람이 그들을 생경스럽게 바라본 이유는 국가가 다름을 넘어 그들이 어떻게든 “공산주의”를 연상시키기 때문인 듯하다. 이는 근자에 뜨고 있는 추성훈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일본 국적으로 귀화해 올림픽에서 한국을 누른 유도 선수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관대하면서, 한국의 학원에 취직을 원하는 재일조선인에게는 그들의 정체성을 숨겨달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추성훈이 “공산주의”에 대해 하등의 의심거리가 없는, 임상적으로 깨끗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추성훈의 경우는 공산주의/반공의 맥락에서 자유로울 때 국가 단위의 정체성이 의외로 쉽게 전복될 수 있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이고, 따라서 이는 역으로 국가 정체성이 강하게 표출되는 자리에 아직도 종종 반공/냉전의 맥락이 도사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증거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일련의 모순을 배태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다름아닌 ‘국가’의 법령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법령은 남북한 상호가 서로를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서 나는, 이 분단 모순을 풀 일차적인 단계가 바로 남한과 북한을 서로 ‘정상 국가’로 인정하는 방안이라고 본다. 예의 그 “애매함”을 국가의 틀로 일단은 정리보자는 것이다. 국가의 틀이 애매한 가운데 턱없이 위험한 가능성을 점치기 보다는, 국가의 틀 안에서 국가보안법 철폐라든지 국가의 통을, 재량을 넓히는 쪽이 더 나은 방안이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요는, 일단은 “국가 안에서 해결을 보자”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국가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여담이지만, 재일조선인들이나 디아스포라가 그토록 국가에 포섭되지 못하는 정체성에 고통받는다면, 이는 역으로 그들에게 그만큼 국가 귀속 정체성이 중요하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 또한, 만약 북일 수교가 되고, 북한 국적이 정식으로 승인된다면, 재일조선인들 중에 한국적과 북한 국적 외에 “반난민”의 ‘조선적’을 고수할 사람이 현실적으로 과연 몇이나 될까.
근대의 이중과제
“이 시스템에서 제외된 자들, 낙오된 자들에 대한 보상은, 이 사람들을 현존하는 국가의 어느 편에 ‘국민’으로 흡수해버리면 끝나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서경식, 본문 중)
물론, 그들이 현실적으로 양쪽의 국적 중 하나를 어쩔 수 없이 선택한다고 해서 그들의 실존이 모두 설명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는 것은 아니다. 생활의 편의상, 명목상 그들이 ‘한국적’, 혹은 ‘북한적’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실존은 여전히 ‘조선적’에 머무를 것이다. 앞서 언급한 독일계 유대인의 예도 바로 이러한 불일치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경우다. 이렇듯 이들의 문제를 국가로 귀속시키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국가 차원에서 해결을 본다고 했을 때 벌어지는 한계는 뚜렷하고, 반드시 놓칠 잉여의 부분은 생기기 마련이다. 인문학자들의 소명은 이러한 잉여의 소외를 끊임없이 밝혀내는데 있고, 서경식 선생 스스로도 밝히듯이 “스스로의 감수성을 최대한 예민하게 만들어 그 소리를 듣고 이를 전달해나가는 것”이 앞으로 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과제는 또 있다. '국가의 틀로는 조명할 수 없다'는 말은, '국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해 놓고 국가가 하지 못한 일은 그것대로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지, '국가' 차원에서 할 일을 안 해놓고 다른 루트로 그에 준하는 달성이 마냥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바가 아님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국가는 국가대로, 제 길을 나아갈 일이다.
민주화든 경제성장이든, 남한의 '국가'적 자부심에 재일동포나 북한은 완벽히 배제되어있다. 분명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이를 뚫기 위해 섣불리 남한의 국가관에 북한이나 재일조선인을 기계적으로 끼워넣는 것도 효과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분단된 채 반세기를 이어온 현재의 상태를 일단 “현실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의 국가 경계가 ‘남한’ 뿐이라면, 우선은 그로부터 새로 시작하는 편이 낫고, 그 “현실화”된 바탕 위에서 앞일을 도모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최소한 제 모자란 국가 정체성을 외부의 긴장을 통해 때워온 남한의 역사를 앞으로 반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국보법 문제가 필시 도마 위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두 ‘국가’의 테두리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반복하지만, 국가를 뛰어넘는 언행을 자주 한다고 국가의 통이 저절로 커지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남북 상호를 국가로 인정하는 과정 속에서 제 3의 재일조선인의 경험은 참으로 유효하게 다뤄져야만 할 것이고, 그 ‘인정’의 과정에서 남북한 스스로 위치지울 ‘국가’의 오지랖은 반드시 재일조선인의 경험을 최대한 그 틀 안에서 배제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리잡힐 일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를 세우는 일과 (현재의)국가를 뛰어넘는 일은 분리될 수 없고, ‘근대의 이중과제’라는 화두를 나는 이런 식으로 읽는다. 그리고 그 이중과제의 큰 단위는, 다름아닌 ‘국가’다. ‘국가’만으로 시민사회의 역동성을 다 담아낼 수 없지만, 역으로 현실적으로 가장 막강한 틀거리인 ‘국가’를 제쳐두고는 어떤 일도 제대로 이뤄낼 수 없다.
1) 이런 맥락에서, 서경식 선생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매우 통쾌한 구석이 있다. 아래의 ‘일본사회’를 ‘한국학계’로 치환해도 상황이 맞아떨어질 듯하다.
“일본사회에는 본질주의적 국가관에 반대하는 입장의 사람들까지도, 집단적 경험으로서 국가와 국민이 일체화된 근대를 전제로 삼아 입론을 하고 그것을 학설상ㆍ관념상으로 부정하는 것이 마치 큰 달성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근대를 통해서 국가와 일체화되어 버리고 만 일본인 매저리티의 의식을 어떻게 타파하고 어떤 경로를 밟아서 어떻게 ‘다음 사회’를 실현해 나갈 것인가, 그것을 현재의 국가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구상할 것인가 하는 논의는 거의 축적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관념성을 지적하면, 그것을 지적하는 쪽이야말로 ‘국가’에 사로잡힌 내셔널리스트다, 본질주의적으로 국가를 말한다고 비난을 받고 마는 도착적 사례를 제 자신 여러번 경험한 바 있습니다.”(본문 중)
_
예전에 국가/탈국가 담론을 읽고 생각해왔던 바와, 최근에 나한테 615 실천단 내부 문건을 들고 "촛불집회 주사파가 주도한 거 아녜요?"라고 한 후배 때문에 총체적으로 받은 짜증과, 뉴라이트의 연이은 개삽질로 인한 씨발스러움과, 이명박 깔라고 시위나가서 찬바닥에 앉았다가 냉큼 도져버린 치질까지 합세, A4 2장 제한에 4장을 써버린, 한달이나 늦은 화풀이용 쪽글 ㄳ.
# by | 2008/06/17 14:34 | 책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